사마리아인
성경 · 무리·민족
사마리아인은 팔레스타인 중부 사마리아 지역에 살며 그리심산을 예배 장소로 삼고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지킨 무리이다.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과 깊이 반목했다.
성경에 나오는 곳
- 구약: 열왕기하 17:24-41에 따르면 북이스라엘 멸망 뒤 앗수르 왕이 바벨론·구다 등지의 사람들을 사마리아 성읍에 옮겨 살게 했다.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면서도 자기 신들을 함께 섬겼다. 포로 귀환 시대에는 에스라 4장에서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이, 느헤미야 4장에서 산발랏과 "사마리아 군대"가 등장한다.
- 복음서: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며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마태복음 10:5).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자고 했다가 꾸지람을 들었다(누가복음 9:51-56). 이 밖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25-37),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돌아와 감사한 사마리아인(누가복음 17:11-19), 수가 동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요한복음 4장)가 있다. 요한복음 4:9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고 덧붙인다.
- 사도행전: 예수는 증인의 범위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로 말했다(사도행전 1:8). 8장에서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뒤이어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안수한다.
배경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북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세멜에게서 산을 사서 세운 도성에서 비롯했다(열왕기상 16:24).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을 하나님이 택한 예배 장소로 여겼다. 경전도 모세오경(사마리아 오경)만 받아들여,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과 갈라섰다. 그리심산 성소는 기원전 2세기 말 유대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에게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라는 말(요한복음 4장 20-23절)에 이 갈등이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그리심산 부근과 이스라엘 홀론에 수백 명 규모의 공동체가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성경 전체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혼합된 예배를 드리는 무리이자 귀환 공동체의 대적으로 그려진다. 신약에서는 이런 경계 밖의 사람이 오히려 감사와 자비의 본보기가 된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고백한다(요한복음 4:42).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는 복음이 유대를 넘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는 첫 단계이다.
해석과 논점
- 기원: 유대 전승과 많은 해석은 열왕기하 17장을 근거로 사마리아인을 이주민과 섞인 무리로 본다. 반면 사마리아인 자신은 에브라임·므낫세 지파와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서 옛 신앙을 지켜 왔다고 주장한다. 공동체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도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설교에서는 흔히 "혼혈이라 멸시받았다"고 하지만, 본문이 주로 문제 삼는 것은 예배와 성전이다.
- 비유 해석: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읽는 우의적(알레고리) 해석을 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이 비유를 대체로 이웃 사랑의 가르침으로 읽는다.
- 사도행전 8장: 사마리아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뒤 사도의 안수로 성령을 받았다. 오순절주의는 이 일을 회심 뒤에 따로 오는 성령세례의 근거로 본다. 개혁주의는 복음이 사마리아로 넘어가는 시점에 한 번 있었던 구속사적 사건으로 본다.
- 덧붙여진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이 한낮에 물을 길은 까닭을 이웃의 따돌림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 사랑과 구제·사회봉사를 다루는 설교에 자주 쓰인다. 사도행전 1:8은 선교 표어로 널리 인용되고,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전도 설교의 본보기로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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