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시아
성경 · 개념·용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곁에 있음', '도착'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성경 속 쓰임
파루시아는 신약성경에 20여 차례 나온다. 대부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복음서 가운데서는 마태복음 24장에만 나온다.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태복음 24:3) 하고 묻는 대목과, 예수가 "인자의 임함"을 번개와 노아의 때에 견주는 대목(마태복음 24:27, 37, 39)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데살로니가전서에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본문은 주가 강림하실 때 먼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가 함께 주를 맞이한다는 내용(데살로니가전서 4:15-17)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2-26절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살아난다고 말한다. 이 밖에 야고보서 5:7-8, 베드로후서 3:4, 요한일서 2:28에도 나온다. 개역개정은 문맥에 따라 '임하심', '임함', '강림' 등으로 옮긴다.
같은 낱말이 사람이 와 있는 것을 뜻할 때도 있다. 스데바나 일행이 온 것(고린도전서 16:17)이나 디도가 온 것(고린도후서 7:6)이 그 예이다.
낱말의 배경
파루시아는 '곁에'(para)와 '있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임재나 도착을 뜻한다. 헬라 세계에서는 왕이나 고관이 도시를 공식 방문하는 일에도 이 말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성경 전체에서의 의미
이 낱말의 배경에는 구약이 있다.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여호와의 날 기대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의 환상(다니엘 7:13)이 그것이다. 마태복음 24:30은 이 다니엘의 표현을 이어받는다. 신약은 같은 사건을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 디도서 2장 13절)이나 '드러남'(아포칼립시스, 고린도전서 1장 7절)이라고도 부른다. 파루시아는 부활, 최후의 심판과 이어진 사건으로 그려진다. 사도신경의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도 이 기대를 담고 있다.
해석과 논점
- 한 번인가 두 단계인가: 세대주의는 대체로 교회가 끌려 올라가는 휴거와 지상 재림을 둘로 나누어 본다. 개혁주의·언약신학 전통은 대체로 한 번의 사건으로 본다. 이 문제는 천년왕국 이해와 맞물려 있으며, 한국 교회에는 교단을 가로질러 두 견해가 함께 있다.
- 마태복음 24장의 범위: 이 장의 상당 부분이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해석(과거주의)이 있다. 장래의 재림을 말한다고 보는 해석, 두 사건이 겹쳐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 지연 문제: 베드로후서 3장은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에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다고 답한다(시편 90편 4절 참고). 근대 학계에는 초대교회가 기대한 임박한 재림이 늦어진 데 대해 교회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루는 '파루시아 지연' 논의가 있다.
- 다른 해석: 여호와의 증인은 이 말을 '임재'로 옮기고, 그리스도가 1914년부터 보이지 않게 임재해 있다고 가르친다. 주요 개신교 교단은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날짜 계산: 성경은 그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마태복음 24:36, 마가복음 13장 32-33절, 사도행전 1장 7절). 날짜를 정해 재림을 예고하는 시한부 종말론은 본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 여러 교단의 공통된 입장이다. 한국에서는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난다는 주장이 퍼져 사회 문제가 된 일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성결교는 중생·성결·신유·재림을 사중복음으로 내세운다. 순복음 계열의 오중복음에도 재림이 들어 있다. 대림절은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이면서 다시 오실 주를 기다리는 절기로도 설명된다.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마라나타는 기도와 찬양에 자주 쓰인다. '파루시아'라는 원어 자체는 주로 종말론을 다루는 설교와 신학 강의에서 재림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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