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역사
박해는 신앙을 이유로 국가나 사회 집단이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가한 억압·처벌·폭력을 말한다. 초대교회부터 한국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의 중요한 경험이다.
박해(迫害)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국가나 사회 집단이 개인이나 공동체를 억누르고 해치는 일을 말한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신앙 때문에 투옥, 재산 몰수, 추방, 처형을 당한 일을 가리킨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순교라 부른다.
배경
신약성경은 박해를 신앙생활에 따르는 일로 기록한다. 예수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10)라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2)고 썼다.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의 순교 뒤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흩어졌다(사도행전 8:1).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인은 황제 숭배와 국가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해치는 무리로 의심받았다.
전개
로마 제국
- 64년: 로마 대화재 뒤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에게 책임을 돌려 처형했다는 기록이 역사가 타키투스의 글에 남아 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울도 이 무렵 로마에서 순교했다.
- 250년: 데키우스 황제는 주민들에게 신들에게 제사하고 증명서를 받도록 명령했다. 이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이 처벌받았다.
-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교회 건물과 성경이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투옥되었다.
-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제국 차원의 박해가 끝났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 시기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박해가 일어났다. 재세례파는 천주교와 개신교 양쪽으로부터 처형을 당했다. 프랑스 개신교도(위그노)는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겪었다.
한국
- 조선 후기 천주교는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여러 차례 큰 박해를 받았다. 같은 해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가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대동강에서 숨졌다.
- 일제강점기에는 105인 사건(1911년)과 3·1운동 때의 제암리 사건(1919년)이 있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신사참배 강요가 이어졌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는 1944년 옥중에서 숨졌다.
- 해방 뒤 북한 지역에서는 공산 정권이 교회를 탄압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많은 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결과와 영향
박해는 교회를 흩어지게 했지만, 흩어진 성도들을 통해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사도행전 8:4). 2~3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뜻의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해는 교회 안에 새로운 과제도 남겼다. 박해 때 신앙을 버린 사람을 다시 받아들일지를 두고 고대 교회에서 논쟁이 일었다. 한국에서는 신사참배에 참여한 지도자들의 책임 문제가 해방 뒤 교회 재건 과정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한국 장로교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고 있다고 보고된다. 한국 교회는 북한 교회와 중국 가정교회 등 박해 아래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 왔다.
평가
한국 교회는 교단을 가리지 않고 박해와 순교의 기억을 신앙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다. 순교자 기념 사업과 순교 신앙 교육도 여러 교단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역사를 균형 있게 보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기의 처형처럼 다른 신앙인을 박해한 일도 있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나 법적 규제를 '박해'로 부르는 표현도 쓰인다. 이에 대해 교회 안의 견해는 갈린다.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는 현실을 경고하는 말로 보는 쪽이 있고, 생명과 자유를 잃는 실제 박해와는 구별해야 한다고 보는 쪽도 있다. 이 문제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도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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