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칙령
역사
밀라노 칙령은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합의해 공포한 종교 관용 정책이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박해 때 몰수한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배경
3세기 말 로마 제국은 여러 황제가 나누어 다스리는 체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03년부터 그리스도인을 겨냥한 칙령을 잇달아 내렸다. 이 칙령들에 따라 예배당이 파괴되고 성경이 불태워졌으며, 성직자가 체포되었다. 이 시기는 흔히 '대박해'라고 불린다.
박해를 주도한 황제 중 한 사람인 갈레리우스는 311년 죽음을 앞두고 관용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지키고 모이는 것을 허락했지만, 빼앗은 재산을 돌려주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동방 일부 지역에서는 그 뒤에도 박해가 이어졌다.
전개
- 312년: 서방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경쟁자 막센티우스를 이겼다. 전투 전에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앞세웠다는 이야기가 락탄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으로 전한다.
- 313년 초: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만났다. 리키니우스는 이때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누이 콘스탄티아와 결혼했다. 두 황제는 종교 정책에 합의했다.
- 313년 6월: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물리친 뒤 니코메디아에서 합의 내용을 담은 서한을 각 지방 총독에게 보냈다.
오늘날 전하는 본문은 이 서한이다.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에 라틴어로,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그리스어로 실려 있다.
내용
칙령의 뼈대는 두 가지이다.
-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원하는 종교를 따를 자유를 준다.
- 박해 때 몰수한 그리스도인의 집회 장소와 공동체 재산을 지체 없이 돌려준다. 그 재산을 사거나 받은 사람은 국가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교를 함께 허용한 것이다. 니케아 신앙을 따르는 그리스도교가 국가 종교로 정해진 것은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의 일이다.
결과와 영향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는 공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에 재산과 특권을 주고 대성당 건축을 후원했다. 321년에는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는 법을 냈는데, 이는 주일 관습과도 연결된다. 324년 리키니우스를 꺾고 제국을 혼자 다스리게 된 뒤에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로써 황제가 교회의 교리 문제에 관여하는 선례가 생겼다. 초대교회가 박해받는 소수 공동체에서 제국의 보호를 받는 공적 종교로 바뀌는 출발점이 이 시기이다.
한국 교회의 교회사 교재와 설교에서는 이 칙령을 흔히 '기독교 공인'(313년)으로 소개한다. 이 때문에 국교화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평가
명칭 문제: 19세기 말부터 일부 학자들은 이 문서의 이름을 문제 삼아 왔다. 밀라노에서 공포된 정식 '칙령'이 아니라, 밀라노 합의를 바탕으로 총독에게 보낸 행정 서한이라는 지적이다. 다만 '밀라노 칙령'이라는 이름은 관용적으로 널리 쓰인다.
종교 자유의 관점: 이 칙령은 국가가 개인의 종교 선택을 보장한 이른 사례로 평가받는다. 반면 그 뒤 국가 권력이 이교와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을 억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교파별 시각: 정교회는 콘스탄티누스를 '사도와 동등한 성인'으로 공경하며, 이 시기를 교회가 평화를 얻은 섭리적 전환으로 본다. 천주교도 대체로 박해 종식의 계기로 긍정한다. 개신교 안에서는 평가가 갈린다. 박해를 끝낸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한편 재세례파 등 자유교회 전통은 이 전환을 교회와 국가가 결합하고 교회가 세속 권력에 기대게 된 출발점, 곧 '콘스탄티누스주의'로 비판해 왔다. 이 논의는 오늘날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둘러싼 토론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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