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숭배
역사
황제 숭배는 고대 로마 제국에서 황제나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제사하던 관행이다. 이를 거부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배경
황제 숭배는 로마 황제를 신(神) 또는 신에 가까운 존재로 받들어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바치던 관행이다. 뿌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헬레니즘 왕국에서 통치자를 신처럼 섬기던 '통치자 숭배'에 있다. 로마는 여러 신을 함께 섬기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래서 황제에게 제사하는 일은 개인의 신앙 고백보다는 제국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는 공적 의례로 여겨졌다.
전개
- 기원전 42년: 로마 원로원이 암살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했다.
- 기원전 29년: 아우구스투스가 소아시아의 버가모 등에 '로마 여신과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로마 본토는 살아 있는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데 조심스러웠지만, 동방 속주에서는 일찍부터 이 숭배가 퍼졌다. 아우구스투스는 14년에 죽은 뒤 신격화되었다.
- 유대 지역에서는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 등에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세웠다. 유대인은 황제에게 직접 제사하는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황제를 위한 제사를 드리도록 허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40년 무렵: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 상을 세우려 했다. 이듬해 그가 암살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주(主)이자 신'으로 불리기를 바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 112년 무렵: 비두니아 총독 소(小)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고발된 그리스도인에게 황제 상 앞에서 향과 포도주를 바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게 했으며, 이를 따른 사람은 풀어 주었다고 보고했다.
- 2세기 중엽: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은 "가이사는 주"라고 말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 250년: 데키우스 황제가 제국 주민 모두에게 신들에게 제사하고 증명서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대규모 박해로 이어졌다. 303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 313년 이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 제사를 금지하면서 황제 숭배도 사라졌다.
결과와 영향
초대교회는 "예수는 주시다"(고린도전서 12장 3절)라는 고백 때문에 황제를 '주'로 부를 수 없었다. 로마 사회는 이런 태도를 신들을 섬기지 않는 '무신론'이자 국가에 대한 불충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위해 기도하고 권세에 순종하라는 가르침(베드로전서 2장 13-17절, 마가복음 12장 13-17절)을 따랐다. 그러나 경배만은 거부하여, 순종과 예배를 구분하였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던 도시 가운데 여러 곳에 황제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의 짐승을 황제 숭배와 연결해 읽는 해석이 많다.
한국 교회는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를 로마 황제 숭배에 빗대어 이해하곤 했다.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를 종교가 아닌 '국가 의례'라고 주장했다. 반면 주기철 등 이를 거부한 이들은 우상 숭배로 보았다.
평가
학자들 사이에서는 황제 숭배를 주로 정치적 충성 의례로 보는 견해와, 참여자들에게 실제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함께 있다. 도미티아누스 때 박해의 규모와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기(네로 시대인지, 도미티아누스 시대인지)도 논쟁 중이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에 대해서도 해석이 갈린다. 1세기 로마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시대마다 반복되는 국가 권력의 우상화를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으며,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로 보는 해석도 있다.
한국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어떻게 회개하고 처리할지의 문제는 한국 장로교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역사는 국가 권력과 신앙의 경계를 묻는 사례로 지금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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