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학파
역사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2~5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초대교회의 신학 전통이다. 성경을 영적·상징적으로 읽는 알레고리 해석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기독론으로 알려져 있다.
배경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에 세운 도시이다. 헬레니즘(그리스 문화) 시대에는 큰 도서관을 갖춘 학문의 중심지였고, 많은 유대인이 살았다. 구약을 그리스어로 옮긴 칠십인역도 이곳에서 번역되었다고 전해진다.
1세기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구약을 알레고리(풍유)로 풀이했다. 알레고리 해석은 본문의 문자적 뜻 뒤에 숨은 도덕적·영적 의미를 찾는 방법이다. 그의 해석 방법은 뒤에 이 도시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마가가 세웠다는 전승이 있다.
전개
- 2세기 후반: 판타이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리문답학교(세례 지원자와 신자를 가르치던 학교)를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세기 말~3세기 초: 클레멘스(150년경~215년경)는 그리스 철학을 복음으로 이끄는 준비로 보았다. 그는 영지주의에 맞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앎을 설명했다.
- 3세기 전반: 오리게네스(185년경~254년경)가 학교를 이끌었다. 그는 성경에 육(문자적 뜻)·혼(도덕적 뜻)·영(영적 뜻)의 세 층이 있다고 보았다. 또 여러 구약 본문을 나란히 비교한 『헥사플라』를 펴냈다. 230년대에 알렉산드리아 주교와 갈등을 겪은 뒤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옮겼다.
- 4~5세기: 이 전통은 교리 논쟁으로 이어졌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325년) 전후로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성자의 온전한 신성을 변호했다. 키릴로스는 에베소 공의회(431년)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맞섰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했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을 옹호했다.
'학파'라는 말은 교리문답학교라는 기관과 넓은 신학 전통을 함께 가리킨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학교가 정식 교육기관이었는지, 교사를 중심으로 모인 모임이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나뉜다.
결과와 영향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시리아의 안디옥 학파와 자주 대비된다. 안디옥 학파는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중시했고, 기독론(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교리)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강조했다. 두 전통의 긴장은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정의, 곧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 혼동도 분리도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고백으로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다만 이집트의 콥트 교회 등은 키릴로스의 표현을 근거로 칼케돈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리게네스의 일부 사상은 그가 죽은 뒤 논란이 되었다. 영혼이 몸보다 먼저 있었다는 주장, 결국 모든 존재가 회복된다는 주장 등이 문제가 되었고,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무렵 오리게네스주의로 정죄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을 여러 층의 의미로 읽는 방식은 중세 서방의 '성경의 네 가지 의미' 해석으로 이어졌다.
평가
천주교와 정교회는 아타나시우스와 키릴로스를 교부(초대교회의 권위 있는 교사)로 존중한다. 오리게네스는 정죄된 사상과 별개로 성경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알레고리 해석이 본문의 뜻을 자의적으로 흐린다고 비판하고 문법적·역사적 의미를 앞세웠다. 오늘날 개신교 해석학은 대체로 알레고리와 예표론을 구별한다. 예표론은 구약의 실제 인물·사건이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준다고 보는 해석이다. 알레고리 해석을 옹호하는 쪽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4:24에서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비유"로 풀이한 예를 근거로 든다.
한국 신학교의 성경 해석학 수업은 흔히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대비에서 시작한다. 교회 현장에서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건너뛰고 상징만 찾는 이른바 '영해(靈解)' 설교를 비판할 때에도 이 학파의 알레고리 해석이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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