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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공의회는 431년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열린 교회 회의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 이)'로 부를 수 있는가를 두고 열렸으며, 세 번째 세계 공의회로 꼽힌다.

배경

5세기 초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를 거치며 삼위일체 교리의 큰 틀을 세웠다. 그러나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두고는 학파마다 강조점이 달랐다. 안디옥 학파는 두 본성(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한 인격으로서의 통일을 강조했다.

42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 이, 흔히 '하나님의 어머니'로 옮김)라 부르는 데 반대했다. 그는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를 낳은 이)라는 표현이 알맞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는 이 주장이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 나눈다고 비판했다. 로마 주교 켈레스티누스 1세도 430년 로마 회의에서 키릴로스 편에 섰다.

전개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베소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해 6월 키릴로스는 회의를 먼저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면직했다. 이때 안디옥 총대주교 요한과 시리아 지역 주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며칠 뒤 도착한 요한 일행은 따로 모여, 거꾸로 키릴로스와 에베소 주교 멤논을 면직한다고 선언했다. 뒤이어 도착한 로마 주교의 사절들은 키릴로스 쪽 결정을 지지했다. 황제는 한때 양쪽 지도자를 모두 구금했으나 결국 네스토리우스의 면직을 받아들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수도원으로 물러났다가 뒤에 유배되었다.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 외에 다른 신경을 새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결정도 내렸다. 또한 펠라기우스파의 켈레스티우스 등을 정죄한 것으로 전해진다. 433년에는 키릴로스와 요한이 '일치 신조'에 합의해 두 진영의 분열을 일단 수습했다.

결과와 영향

  •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이 정통 표현으로 공인되었다. 이 결정의 초점은 마리아 자체보다 마리아에게서 난 분이 참 하나님이라는 기독론 고백에 있었다고 설명된다.
  •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부 시리아 계통 교회는 페르시아 지역의 동방교회로 이어졌다. 이 교회는 서방에서 '네스토리우스파'로 불렸으나 스스로는 그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나라에 전해진 경교(景敎)도 이 계통이다.
  • 반대로 알렉산드리아 쪽 강조를 더 밀고 나간 주장도 나왔다. 449년 에베소에서 다시 열린 회의(이른바 '강도 회의')가 이 주장을 지지했으나,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두 본성, 한 인격"이라는 정식을 확정했다.

평가

천주교와 정교회는 에베소 공의회를 세 번째 세계 공의회로 받아들인다. 개신교에서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이 처음 네 공의회의 기독론 결정을 대체로 인정했다. 한국 개신교 교단들도 그 기독론 내용은 정통으로 본다. 다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마리아 공경과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잘 쓰지 않는 편이다.

회의 진행에 대해서도 여러 지적이 있다. 한쪽 진영이 상대가 도착하기 전에 결정을 내린 점,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교권 경쟁이 작용한 점 등이다. 19세기 말 네스토리우스의 저작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이 발견된 뒤로는 그의 실제 주장이 정죄된 내용과 달랐다는 재평가도 나왔다. 199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리아 동방교회 총대주교 마르 딩카 4세가 공동 기독론 선언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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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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