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왕조
역사
셀레우코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그의 장군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헬레니즘 왕조이다. 기원전 312년 무렵부터 기원전 64년까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다스렸고,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 땅을 지배했다.
배경
기원전 32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그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이 가운데 바빌로니아를 맡은 셀레우코스 1세가 동방 영토를 차지했고, 그의 후손이 다스린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라 한다. 이 왕조는 오늘날의 시리아, 이라크, 이란 일대에 걸쳐 있었다. 이집트를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경쟁 관계였다. 두 왕조는 모두 헬레니즘, 곧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가 섞인 문화를 퍼뜨렸다.
전개
건국과 확장
- 기원전 312년 무렵: 셀레우코스 1세가 바벨론을 되찾았다. 이해를 기준으로 하는 '셀레우코스 기원'이라는 연대 계산법이 뒤에 널리 쓰였다.
- 기원전 300년 무렵: 오론테스강 가에 안디옥(안티오키아)을 세웠다. 이름은 셀레우코스의 아버지 안티오코스에게서 따왔다. 이 도시는 뒤에 왕조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 기원전 3세기: 팔레스타인을 놓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 시기 유대 땅은 대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다.
유대 지배와 안티오코스 4세
- 기원전 200년 무렵: 안티오코스 3세가 파니온 전투에서 이겨 유대 땅을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로 삼았다.
- 기원전 190년 무렵: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에 패했다. 이후 맺은 아파메이아 조약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 기원전 175~164년: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가 다스렸다. 마카베오서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에게 그리스식 생활을 강요했고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금했다. 기원전 167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 제사를 들여 성전을 더럽혔다고 전한다.
- 기원전 167년 무렵: 이에 맞서 제사장 가문인 마카베오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164년에 성전을 되찾아 다시 봉헌했고, 이 일을 기념하는 절기가 수전절(하누카)이다. 요한복음 10:22에도 이 절기가 나온다.
쇠퇴와 멸망
기원전 2세기 중엽 이후 왕조는 내부의 왕위 다툼에 시달렸다. 동쪽에서는 파르티아에 메소포타미아를 빼앗겼다. 유대는 하스몬 왕조 아래 사실상 독립했다. 기원전 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로마 속주로 삼으면서 왕조는 끝났다.
결과와 영향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신구약 중간기 유대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쪽과 율법 전통을 지키려는 쪽이 갈라섰다. 뒤에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같은 무리가 형성되는 배경도 이 시기에 마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조가 세운 안디옥은 신약 시대에 이방인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사도행전 11:26에 따르면 제자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곳도 안디옥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전도 여행을 떠난 항구 실루기아(사도행전 13:4)도 셀레우코스 왕조가 세운 도시이다.
평가
다니엘 11장의 '남방 왕'과 '북방 왕'은 전통적으로 각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로 해석되어 왔다.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다니엘 11:31)은 흔히 안티오코스 4세의 성전 모독과 연결된다. 다만 이 본문을 읽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르다.
- 보수적 복음주의 학자들은 다니엘서를 기원전 6세기의 예언으로 보고, 이 사건들이 예언대로 성취되었다고 이해한다.
- 역사비평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안티오코스 4세 시대인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묵시 문학이라고 본다.
예수가 마태복음 24:15에서 이 표현을 다시 쓴 일 때문에, 이 시대는 종말론 논의에서도 자주 다루어진다.
이 시기 역사를 전하는 마카베오서는 교파마다 지위가 다르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이를 외경으로 분류하여 정경에 넣지 않는다. 천주교와 정교회는 이를 경전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는 '제2경전'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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