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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파괴 (70년)

역사 · 같은 말: 예루살렘 멸망

예루살렘 파괴(70년)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 티투스가 이끈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제2성전을 불태운 사건이다. 이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배경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다시 지은 성전이다. 흔히 제2성전이라 부르며, 헤롯 대왕 때 크게 넓혀 지었다. 1세기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총독의 가혹한 통치와 세금, 종교적 갈등이 쌓이면서 반로마 감정이 커졌고, 열심당 같은 무장 저항 세력도 활동했다. 66년 총독 플로루스가 성전 금고의 돈을 가져간 일 등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로써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유대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개

  • 66년: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나 물러났다.
  • 67년: 네로 황제가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갈릴리 등 북부 지역을 진압했다. 이때 유대 쪽 지휘관이던 요세푸스가 로마에 투항했다. 그는 뒤에 이 전쟁의 주요 기록인 『유대 전쟁사』를 썼다.
  • 69년: 로마 내전 끝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었고, 아들 티투스가 유대 원정을 이어받았다.
  • 70년: 티투스는 유월절 무렵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성안에서는 여러 분파가 서로 다투었고, 포위가 길어지면서 굶주림이 심해졌다. 로마군은 성벽을 차례로 무너뜨린 뒤 여름에 성전을 불태웠고, 이어 도시 대부분을 파괴했다. 유대 전통은 성전이 무너진 날을 아브월 9일로 기억하며 금식일로 지킨다.
  • 73년 또는 74년: 마지막 거점인 마사다가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요세푸스는 포위 기간에 110만 명이 죽었다고 적었다. 학자들은 이 숫자를 대체로 과장된 것으로 본다.

결과와 영향

  • 성전 제사가 끊기면서 구약의 제사와 대제사장 제도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무너졌다. 성전에 기반을 두었던 사두개인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신 바리새인의 전통을 이은 랍비들이 율법 연구와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다시 세웠으며, 그 중심지는 얌니아(야브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로마는 승리를 기념해 로마에 티투스 개선문을 세웠다. 개선문에는 등잔대 등 성전 기물을 나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 성전 터를 둘러싼 서쪽 옹벽의 일부가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남아 있다.
  • 4세기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쟁 전에 요단강 동쪽 펠라로 피신했다는 전승을 전한다. 이 무렵을 지나며 초대교회와 유대교는 점차 뚜렷하게 갈라졌다.
  •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예루살렘은 로마식 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뀌었다. 132~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기독교는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 파괴를 예고한 말씀과 연결해 읽어 왔다. 해당 본문은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19:41-44, 누가복음 21:20-24이다.

이 예고를 어디까지 70년 사건으로 볼지는 해석이 갈린다.

이 문제는 종말론 논의와 이어져 있다.

성경 연구에서는 이 사건이 신약 문서의 저작 연대를 가늠하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일부 학자는 복음서의 성전 파괴 예고가 구체적이라는 점을 들어 해당 복음서가 70년 이후에 쓰였다고 본다. 다른 학자들은 이를 예수의 실제 예언으로 보고, 더 이른 시기의 저작을 주장한다. 이는 공관복음 문제와도 관련된다. 또 히브리서가 성전 제사를 현재 일처럼 다루면서 성전 파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서신의 저작 연대를 가늠하는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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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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