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
역사
마사다는 사해 서쪽 유대 광야의 바위 고원에 있는 고대 요새이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끝 무렵 유대인 저항 세력이 이곳에서 로마군에 맞서다 함락되었다.
배경
마사다는 사해 서쪽 기슭에 솟은 바위 고원이다. 꼭대기는 평평하고 사방은 가파른 절벽이다. 이름은 히브리어 '메차다'에서 왔으며 '요새'라는 뜻이다. 성경에 '마사다'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같은 낱말이 사무엘상 22장 등에서 다윗이 몸을 숨긴 '요새'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인다.
마사다에 관한 문헌 기록은 대부분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 기대고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곳에 처음 요새를 쌓은 사람은 하스몬 왕조(신구약 중간기에 유대를 다스린 왕조)의 대제사장 요나단이다. 그 뒤 헤롯 대왕이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요새를 크게 넓혀 궁전과 식량 창고, 빗물을 모아 두는 대형 저수조를 갖춘 피난 요새로 만들었다.
전개
- 66년: 유대에서 로마에 맞선 반란(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시카리'라 불린 과격 저항파가 마사다를 차지했다. '시카리'는 단검을 품고 다닌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이름이다. 이들은 흔히 열심당과 한데 묶이지만, 요세푸스는 두 무리를 구분해 적었다. 사도행전 21:38의 '자객'이 이 무리를 가리키는 말로 알려져 있다.
-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웠다. 남은 저항 세력 일부는 엘아자르 벤 야이르를 지도자로 삼아 마사다에서 버텼다.
- 73년 무렵(74년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유대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가 로마 제10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를 포위했다. 로마군은 둘레에 포위벽과 진지를 쌓고, 서쪽 비탈에 거대한 흙 경사로를 만들어 공성 장비를 올렸다. 요세푸스는 성벽이 뚫리기 전날 밤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엘아자르의 연설을 들은 수비대와 가족 960명이 포로가 되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물길에 숨어 있던 여자 둘과 아이 다섯만 살아남았다.
결과와 영향
마사다 함락으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 이갈 야딘이 대규모 발굴을 했다. 이 발굴에서 헤롯의 궁전과 로마군의 포위 시설이 드러났다. 이름이 적힌 도기 조각도 여럿 나왔는데, 그 가운데 '벤 야이르'라는 이름이 있어 요세푸스가 전한 제비뽑기와 관련짓는 해석이 있다. 집회 장소로 쓰인 건물도 나왔으며, 학계에서는 이를 회당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밖에 집회서(벤 시라) 사본과, 사해 사본이 나온 쿰란에서도 발견된 문서의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마사다는 민족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한국 교회의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는 쿰란, 엔게디와 함께 자주 들르는 곳이다.
평가
- 사료의 한계: 요세푸스는 현장에 있지 않았고 당시 로마 쪽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엘아자르의 연설 같은 대목은 그가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 집단 자결의 사실 여부: 유대 율법이 자살을 금한다는 점, 발굴된 유골이 기록된 인원보다 훨씬 적다는 점 등을 들어 요세푸스의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반대로 고고학 발견이 그의 기록과 대체로 들어맞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인물들에 대한 평가: 마사다의 수비대를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운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한편 요세푸스는 이들이 엔게디 마을을 습격해 많은 주민을 죽였다고도 기록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이들을 과격 무장 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기독교 쪽에서는 마사다를 예수와 사도들이 살던 시대 전후의 유대 사회와 성전 파괴를 이해하는 배경 자료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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