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의 부활
성경 · 사건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사건이다. 예수가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 낸 일로, 요한복음의 표적 가운데 마지막이자 가장 큰 것으로 흔히 꼽힌다.
본문과 내용
요한복음 11:1-44에 기록되어 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자,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 사람을 보냈다. 예수는 소식을 듣고도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문 뒤 유대로 향했다. 예수가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 지나 있었다.
예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25)라고 말했다. 마르다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요한복음 11:27). 예수는 우는 이들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요한복음 11:35). 이어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게 하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렀다. 그러자 나사로가 손발이 베로 동여진 채 걸어 나왔다.
배경
본문은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오 리쯤" 떨어져 있다고 적는다(요한복음 11:18). 이는 약 3킬로미터 거리로, 감람산 동쪽 기슭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엘르아살의 헬라어 형태이며, 흔히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무덤은 굴을 파고 돌로 입구를 막은 형태였다(요한복음 11:38). 본문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는 점과 냄새가 난다는 마르다의 말을 통해, 나사로가 확실히 죽었음을 강조한다.
성경 전체에서의 의미
요한복음은 예수의 기적을 그가 누구인지 가리키는 '표적'으로 서술한다. 이 사건은 그 가운데 절정에 놓이며 흔히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에 넣어 센다. 함께 나오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는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은 수난 이야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 일 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아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1:49-53).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다(요한복음 12:10). 생명을 준 표적이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구약에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린 기록이 있고, 복음서에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같은 이야기도 있다.
해석과 논점
- 소생과 부활: 많은 해석자는 이 사건을 '소생'이라 부르며 부활과 구분한다. 소생은 죽을 몸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고, 부활은 다시 죽지 않는 몸으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서도 이 사건을 마지막 날의 부활(요한복음 5:28-29)을 미리 보여 주는 표징으로 읽는다. 본문은 나사로가 이후 어떻게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 역사성: 이 사건은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다. 이를 근거로 일부 비평학자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구성으로 본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 예수의 눈물: 예수의 참된 인간적 감정을 보여 주는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 덧붙여 전해지는 이야기: 이 나사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와 다른 인물이다. 서방 교회에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전통이 있었으나, 본문에는 그런 근거가 없다. 나사로가 뒤에 구브로(키프로스)에서 감독이 되었다는 동방 전승과 프랑스 남부로 건너갔다는 서방 전승도 있다. 둘 다 성경 밖의 이야기이다.
한국 교회에서
요한복음 11:25-26은 장례예배와 추도예배에서 자주 봉독되고 설교 본문으로도 많이 쓰인다. 정교회는 종려주일 전날을 '나사로의 토요일'로 지킨다. 한국 개신교에는 이 사건을 따로 기념하는 절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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