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 유대교
역사
랍비 유대교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제사 대신 율법 연구와 기도, 회당을 중심으로 다시 세워진 유대교이다. 오늘날 유대교 대부분이 이 전통에서 나왔다.
배경
'랍비'는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의 존칭이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를 이렇게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요한복음 1:38). 1세기 유대 사회에는 여러 무리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주관한 제사장 계층과 사두개인, 율법 해석과 일상의 실천을 중시한 바리새인, 따로 공동체를 이루어 산 에세네파 등이다. 바리새인은 기록된 율법인 모세오경뿐 아니라 조상 대대로 전해 온 해석과 관습도 권위 있는 전통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뒤에 '구전 율법', 곧 입으로 전해진 율법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바울의 스승으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말리엘(사도행전 22:3)은 유대 전승에서도 초기 현자로 기억된다.
전개
-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제사가 멈추면서 제사장과 사두개인의 영향력이 크게 줄었고, 성전 없이 신앙을 이어 갈 길이 필요해졌다.
- 70년 이후: 전승에 따르면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해안 도시 야브네(얌니아)에 학당을 세우고 율법 학자들을 모았다. 이 무렵 '얌니아 회의'가 구약 정경을 확정했다는 설명이 흔히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공식 회의가 정경을 결정했다는 데 의문을 두는 견해가 많다.
- 132~135년: 바르 코크바가 이끈 반로마 항쟁이 실패했다. 이후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고, 학문의 중심은 갈릴리 지방으로 옮겨 갔다.
- 200년 무렵: 랍비 유다 하나시가 구전 율법을 주제별로 정리한 '미쉬나'를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400년 무렵과 500년 무렵: 미쉬나를 두고 후대 랍비들이 벌인 토론과 해설을 엮은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론 탈무드'가 차례로 이루어졌다. 정확한 완성 시기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결과와 영향
동물 제사가 사라진 자리는 기도와 율법 연구, 선행이 대신했고, 회당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공동체는 제사장이 아니라 율법에 정통한 학자인 랍비가 이끌었다. 안식일, 음식 규정, 절기 등 생활 전반의 규범은 탈무드를 바탕으로 체계화되었다. 7~10세기 무렵에는 유대 학자인 마소라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 부호와 주석을 달았다. 이렇게 전해진 마소라 본문은 오늘날 개신교 구약 번역의 주된 바탕이다. 현대의 정통파·보수파·개혁파 유대교는 해석의 폭은 다르지만 모두 랍비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왔다.
평가
- 유대교의 이해: 성전 파괴와 흩어짐 속에서 민족과 신앙을 지켜 낸 전통으로 본다. 전통적으로는 구전 율법도 시내산에서 기록된 율법과 함께 모세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 기독교의 이해: 기독교에서는 오랫동안 바리새인과 랍비 유대교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로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를 다시 보는 연구가 나왔다.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1977)는 랍비 문헌 속 유대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맺은 언약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종교로 설명했고, 이런 연구가 '바울에 관한 새 관점' 논의로 이어졌다. 이 해석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칭의 교리를 흐린다는 비판도 있다.
- 신약 연구에서의 활용: 신약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랍비 문헌이 널리 참고된다. 다만 미쉬나와 탈무드는 신약보다 늦게 편찬되었으므로 그 내용을 그대로 1세기 상황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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