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 수도회
역사
탁발 수도회는 13세기 서유럽에서 생겨난 천주교 수도회의 한 형태로, 수도회 공동 재산을 두지 않고 신자들의 헌물과 구걸로 생활하며 도시를 다니며 설교한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 등을 가리킨다.
탁발은 '바리때(그릇)를 들고 먹을 것을 빌다'라는 뜻으로, 구걸하며 수행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영어로는 '멘디컨트 오더(mendicant order)'라고 하고, 그 수도자는 흔히 '수사(friar)'라고 부른다.
배경
11~12세기 서유럽에서는 도시와 상업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전까지 수도원은 주로 베네딕도회 계열이었는데, 이 수도원들은 농촌의 넓은 토지를 기반으로 한곳에 머물러 사는 공동체였다. 수도원이 부유해지자 사도들처럼 가난하게 살며 복음을 전하자는 '사도적 청빈' 운동이 평신도 사이에서 일어났다. 리옹의 상인 발데스를 따른 발도파처럼, 교회의 허가 없이 설교하다가 정죄된 무리도 있었다. 탁발 수도회는 이런 청빈과 설교의 요구를 교회 제도 안에 받아들인 형태로 설명된다.
전개
- 프란치스코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년경~1226)가 시작했다. 1209년경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구두로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회칙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정식 이름은 '작은 형제회'이다.
- 도미니코회: 도미니코(1170년경~1221)가 남프랑스에서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카타리파를 상대로 설교하면서 시작했다. 1216년 호노리오 3세의 승인을 받았으며, 정식 이름은 '설교자 수도회'이다.
- 그 밖의 수도회: 13세기 중반에는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1256년 여러 은수자 공동체를 통합)도 탁발 수도회의 대열에 들어섰다. 이후 비슷한 단체가 잇따라 생기자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가 새 탁발 수도회의 난립을 제한했다.
탁발 수도회는 개인 재산뿐 아니라 수도회 공동 재산도 크게 줄이거나 포기했다. 도시에 머물면서 지역 교구에 매이지 않고 이동하며 설교했고, 교황에게 직접 속했다는 점에서 이전 수도원과 달랐다.
결과와 영향
- 학문: 탁발 수사들은 파리·옥스퍼드 등 대학에 진출했다.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와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이 대표적이다.
- 갈등: 설교·고해·장례 권한을 두고 교구 성직자와 자주 부딪쳤다. 1250년대 파리 대학에서 벌어진 논쟁이 잘 알려져 있다. 프란치스코회 안에서는 청빈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킬지를 두고 분열이 일어났다.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단으로 선언했다.
- 종교재판과 선교: 탁발 수사들은 중세 이단 심문에 깊이 관여했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선교에 참여했다.
- 종교개혁과의 연결: 마르틴 루터는 1505년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에 들어간 탁발 수사였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으로 문제 삼은 면벌부 설교의 대표적 인물인 요한 테첼은 도미니코회 수사였다.
평가
천주교는 탁발 수도회를 중세 교회를 새롭게 한 운동으로 본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는 성인으로 공경받으며, 두 수도회는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 서원 자체를 비판했다. 루터는 1521년 『수도 서원에 관하여』에서 서원으로 더 높은 거룩함에 이른다는 생각이 이신칭의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과 일상 직업의 소명을 강조하며 수도원 제도를 폐지했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구걸하는 관행도 비판했다.
한편 개신교 안에서도 프란치스코의 청빈과 가난한 이를 향한 구제, 탁발 수사들의 거리 설교와 선교 열정을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다. 다만 이것을 수도 제도와는 구별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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