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공의회
역사
아를 공의회는 31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소집으로 갈리아의 아를에서 열린 서방 교회 감독들의 회의이다. 도나투스파 분쟁을 심의해 카르타고 감독 카이킬리아누스를 인정했고, 세례·안수·부활절에 관한 규정을 정했다.
아를 공의회는 314년 로마 제국 갈리아 지방의 도시 아를(라틴어 아렐라테, 오늘날 프랑스 남부)에서 열린 교회 회의이다. 공의회(公議會)는 여러 지역 교회의 대표가 모여 교리와 규율을 정하는 회의를 말한다. 아를에서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교회 회의가 열렸지만, 흔히 아를 공의회라고 하면 314년 회의를 가리킨다.
배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03년 무렵 시작) 때 북아프리카에서는 성경 사본과 교회 기물을 당국에 넘겨준 성직자를 '트라디토르'(넘겨준 자)라고 불렀다. 311년 무렵 카르타고 감독(주교, 한 지역 교회를 책임지는 성직자)으로 세워진 카이킬리아누스를 두고, 그에게 안수한 압퉁가의 펠릭스가 트라디토르였다는 비난이 일었다. 누미디아 지방 감독들은 카이킬리아누스를 인정하지 않고 마요리누스를 따로 세웠다. 그 뒤를 도나투스가 이으면서 이 무리는 도나투스파로 불리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박해 때 신앙을 저버린 성직자가 집례한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보았다.
도나투스파의 호소를 받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로마 감독 밀티아데스가 주재한 로마 회의에 사건을 맡겼다. 이 회의는 카이킬리아누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도나투스파가 판정에 불복하자, 황제는 더 넓은 지역의 감독들을 불러 다시 심의하게 했다.
전개
공의회는 314년 8월에 열렸다. 아를 감독 마리누스가 회의를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감독 실베스테르 1세는 직접 참석하지 않고 사제와 부제를 대리인으로 보냈다. 갈리아·이탈리아·히스파니아(스페인)·북아프리카·브리타니아(영국)에서 감독들이 모였고, 서명 명단에 남은 감독은 서른 명 남짓으로 알려져 있다. 명단에 브리타니아 감독 세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어, 이 회의는 초기 영국 교회의 존재를 보여 주는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공의회는 카이킬리아누스를 다시 인정하고 도나투스파의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울러 20여 개의 교회법 조항(카논)을 정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부활절을 온 교회가 같은 날 지키게 하고, 그 날짜는 로마 감독이 알린다.
- 이단 집단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다시 베풀지 않고 안수만 한다. 다시 세례를 베풀던 북아프리카의 관행과 다른 결정이다.
- 성경 등을 넘겨준 사실이 공문서로 입증된 성직자는 면직한다. 다만 그가 이전에 베푼 성직 임명은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
- 감독은 혼자 세우지 않고 적어도 세 명의 감독이 함께 세운다.
- 그 밖에 성직자의 이동과 배교자의 처리 등을 정했다. 군 복무와 관련된 조항도 있는데, 그 뜻을 두고는 해석이 갈린다.
결과와 영향
도나투스파는 다시 황제에게 호소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밀라노에서 직접 심리한 뒤 역시 카이킬리아누스 편을 들었다. 제국은 한때 도나투스파를 강제로 억누르다가 관용으로 돌아섰고, 도나투스파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북아프리카에서 큰 세력을 유지했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를 반박하면서, 성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도덕적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아를 공의회의 세례·안수 결정은 이 논리를 앞서 보여 준 사례로 꼽힌다.
아를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한 교회 회의라는 점에서 11년 뒤 열린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선례가 되었다. 부활절 날짜를 하나로 맞추는 문제도 니케아에서 다시 다루어졌다.
평가
천주교와 정교회는 이 회의를 서방 일부 지역의 회의로 보며, 전체 교회의 공의회(세계 공의회)로 세지 않는다. 황제가 교회 분쟁에 직접 나선 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교회가 국가 권력에 기대기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고, 분열을 막으려는 현실적 조치였다는 시각도 있다.
종교개혁 시기 루터·칼뱅 등 주류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에 기대어, 로마 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다시 베풀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신자의 세례를 주장한 재세례파를 도나투스파에 견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재세례파와 그 흐름을 잇는 교회들은 자신들의 쟁점은 집례자의 자격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근거한 세례에 있다며 이 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 교회에서도 다른 교단에서 받은 세례를 어떻게 인정할지는 교단마다 다르다. 많은 침례교회는 신앙고백 뒤에 받는 침례를 기준으로 삼는다(세례와 침례 참고).
해방 뒤 한국 장로교에서는 신사참배에 참여한 목회자의 자숙과 복귀 문제가 큰 갈등이 되었다. 이 갈등을 도나투스 논쟁에 견주어 설명하는 글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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