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투스파
역사
4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교회 분파이다. 박해 때 신앙을 저버린 성직자가 집례한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보아 가톨릭교회와 갈라섰고,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을 통해 교회론과 성례론에 큰 영향을 남겼다.
배경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박해를 시작하면서 당국은 교회에 성경과 교회 기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성경을 넘겨준 성직자는 라틴어로 '넘겨준 자'라는 뜻의 트라디토르(traditor)라 불렸다. 박해가 끝난 뒤 북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이들을 다시 받아들일지, 이들이 베푼 세례와 서품(성직 임명)이 유효한지를 두고 갈등이 일었다. 이 지역에는 3세기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 때부터 교회 밖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이 도나투스파 주장의 바탕이 되었다.
전개
311년 무렵 카이킬리아누스가 카르타고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런데 그를 서품한 주교 가운데 압퉁가의 펠릭스가 트라디토르였다는 고발이 나왔다. 누미디아 지역 주교들은 이 서품이 무효라며 마요리누스를 따로 주교로 세웠다. 마요리누스의 뒤를 이은 도나투스가 운동을 이끌면서 '도나투스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 313년 로마 회의와 314년 아를 회의는 카이킬리아누스의 손을 들어 주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이 결정을 따랐다.
- 317년 무렵부터 탄압이 이어졌으나, 321년 황제는 관용 정책으로 돌아섰다.
- 347년 콘스탄스 황제 때 강제 통합이 시도되었고, 도나투스는 망명지에서 죽었다.
- 361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뒤 망명자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도나투스파는 다시 세력을 키워 한때 북아프리카에서 가톨릭교회보다 우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키르쿰켈리오네스'라 불린 무리가 폭력을 동반한 활동을 벌였다.
-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통합령을 내렸다. 411년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황제의 관리 마르켈리누스가 가톨릭 쪽의 승리를 선언했고, 이후 도나투스파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쟁점
도나투스파는 교회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대한 죄를 지은 성직자가 집례한 성례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고,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넘어온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의 효력이 집례자의 거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다고 반박했다. 그는 가라지 비유(마태복음 13:24-30)를 들어, 땅 위의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인 공동체이며 둘을 최종적으로 가르는 일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이 하신다고 설명했다. 도나투스파는 비유 속의 '밭'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마태복음 13:38)을 가리킨다고 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에는 설득을 주장했다. 그러나 뒤에는 국가 권력을 동원한 강제를 지지하게 되었고, 누가복음 14:23의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를 근거로 들었다.
결과와 영향
도나투스파는 411년 이후 쇠퇴했지만, 반달족 지배기를 거쳐 6세기 말까지도 문헌에 언급될 만큼 명맥을 이었다.
집례자의 자격과 성례의 효력을 구분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서방 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이 이해는 이어졌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8조는 도나투스파를 이름을 들어 정죄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7장 3절은 성례의 효력이 집례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다고 밝힌다. 종교개혁자들은 재세례파를 비판할 때 도나투스파에 빗대기도 했다. 재세례파 쪽은 자신들의 쟁점이 집례자의 자격이 아니라 신앙고백 없는 유아세례가 정당한지에 있다고 보았다.
한국 교회에서는 집례한 목사가 훗날 비위로 면직되더라도 그가 베푼 세례를 무효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성직자의 도덕성을 성례의 효력과 직접 연결하는 태도를 비판할 때 '도나투스주의적'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침례교처럼 신자의 침례를 고수하는 교단이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며, 집례자의 자격을 문제 삼은 도나투스파의 경우와는 구별된다.
평가
가톨릭과 대부분의 개신교 전통은 도나투스파를 교회의 일치를 깨뜨린 분리주의 운동으로 평가한다. 반면 박해를 겪은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려 한 운동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20세기 역사가 W. H. C. 프렌드는 로마 지배에 대한 북아프리카 토착민의 사회적·지역적 저항이 이 운동에 섞여 있었다고 보았으나, 이 해석이 지나치다는 반론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제를 정당화한 논리는 후대 교회가 종교적 강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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