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
역사 · 같은 말: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 선교
경교(景敎)는 당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를 부르던 이름이다. 페르시아의 동방교회(흔히 '네스토리우스파'라 부름)가 635년에 전했고, 845년 무렵까지 약 210년 동안 당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퍼졌다.
배경
경교는 페르시아(오늘날 이란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동방교회가 당나라에 전한 기독교를 중국에서 부르던 이름이다. '경(景)'은 '빛, 밝음'을 뜻한다.
이 교회의 신학 전통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이어진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신성(하나님으로서의 본성)과 인성(사람으로서의 본성)을 뚜렷이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공식 판정)되었다. 이 전통을 따르는 교회는 페르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비단길을 따라 동쪽으로 선교했다. 흔히 '네스토리우스파'라 부르지만 이 교회가 스스로 붙인 이름은 아니어서 '동방교회'라고 부르는 연구자도 많다.
전개
- 635년(태종 정관 9년): 선교사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의 수도 장안(오늘날 시안)에 도착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보내 이들을 맞이하고,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게 했다.
- 638년(정관 12년): 태종의 조칙으로 선교가 허락되었다. 장안에 사원을 지어 승려 21명을 두었는데, 처음에는 '파사사(波斯寺, 페르시아 절)'라 불렸다. 뒤에 로마를 가리키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 고종 대: 아라본이 '진국대법주'에 봉해지고, 여러 지방에 경교 사원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 781년(덕종 건중 2년): 이사(伊斯)의 후원으로 장안 대진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졌다. 경정(景淨)이 비문을 지어 경교의 교리와 635년 이후 중국에 전해진 역사를 한문으로 적었다. 승려 70여 명의 이름은 시리아 문자로 새겼다.
- 회창 연간(841~846년): 도교를 숭상한 무종이 외래 종교를 탄압하면서(회창폐불) 많은 대진사가 파괴되었다. 비석도 이 무렵 땅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결과와 영향
이후 경교는 중국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13세기 몽골 제국을 찾은 수도사 루브룩은 중국 여러 도시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있다고 기록했다.
비석은 명나라 말기인 1620년대(1623년으로 전한다)에 발굴되었고, 1907년 시안 비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기독교가 동아시아에 전해진 사실을 보여 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 가운데 하나로, 중국 교회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신라에도 경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경주 일대의 십자 모양 유물 등을 근거로 드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기록은 없어 추정에 머물러 있다.
평가
- 선교 방식: 황실의 허락을 얻고 경전을 한문으로 옮겨, 현지 말로 복음을 전하려 한 첫 시도로 평가된다.
- 혼합 논란: 불교·도교의 용어와 형식을 많이 빌려 기독교 고유의 메시지가 흐려졌다는 비판이 있다. 반면 그 문화에 맞추어 뿌리내리려 한 토착화의 사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도 토착화 신학과 선교 방법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된다.
- 한계: 황실의 보호에 크게 기대었기 때문에, 황실의 정책이 바뀌자 급격히 쇠퇴했다는 평가가 많다.
- 신학: 천주교·정교회와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의 기독론을 받아들인다. 다만 동방교회의 실제 가르침이 정죄된 내용과 같았는지를 두고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다.
함께 보기 7
참고한 자료 7곳
-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한국가톨릭대사전)
- [경교의 동방전래와 그 영향] 3. 당나라의 경교 (가톨릭신문)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위키백과)
- 대진사 (위키백과)
- [시안 비림박물관]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유목민 이야기 40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 신라시대의 경교의 접촉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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