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의 향유 사건
성경 · 사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서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은 사건이다. 예수는 이를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본문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요한복음 12:1-8에 나온다. 장소는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마을 베다니이고, 때는 유월절을 며칠 앞둔 예수의 마지막 주간이다.
- 마태복음·마가복음: 예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옥돌로 만든 향유 그릇)에 담긴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마가복음은 이 향유가 "순전한 나드"였고,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고 적는다. 몇 사람(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낭비라며 화를 냈다. 예수는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일도 전해져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 요한복음: 유월절 엿새 전,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에서 마르다는 시중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마리아가 나드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자 집에 향기가 가득했다. 가룟 유다는 이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요한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도둑이어서 그렇게 말했다고 덧붙인다.
배경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 비탈에 있던 마을이다. 요한복음 11:18은 이 마을이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약 15스타디온, 3km 남짓) 떨어져 있다고 적는다. 나드는 인도·히말라야 지역에서 나는 식물에서 얻은 향유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었다(마태복음 20:2). 따라서 삼백 데나리온은 일 년 품삯에 가까운 큰돈이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일은 손님을 대접하는 관습이기도 했고, 왕과 제사장을 세울 때 하던 기름 부음을 떠올리게 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성경 전체에서의 의미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모두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일을 왕을 세우는 의식이 아니라 장례 준비로 풀이하셨다. 마가복음 16:1에서 여인들은 향품을 들고 무덤에 갔지만 예수의 몸에 바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베다니의 향유가 예수께 실제로 부어진 장례의 기름이 되었다고 읽는 해석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이야기 바로 뒤에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기기로 하는 장면을 둔다. 그래서 아낌없는 헌신과 돈을 위한 배신을 대비시킨 것으로 흔히 읽는다.
해석과 논점
- 같은 사건인가: 마가복음은 유월절 이틀 전 이야기 사이에 이 사건을 두고, 요한복음은 유월절 엿새 전으로 적는다. 향유를 부은 곳도 마태·마가는 머리, 요한은 발이다. 많은 학자는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전한 것으로 보지만, 두 번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누가복음 7장과의 관계: 누가복음 7:36-50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부었다. 이 이야기는 장소가 베다니로 나오지 않고 시기도 공생애 중반이어서, 대체로 별개 사건으로 본다.
- 여인은 누구인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요한복음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한다(마르다와 마리아 참고). 서방 교회에서는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설교 이후 이 마리아와 누가복음 7장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한 사람으로 보는 전통이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그런 연결이 없다. 정교회는 이들을 구별해 왔고, 개신교도 대체로 구별한다.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이 말씀을 구제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 해석이 많다. 마가복음 14:7은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다고 덧붙이며, 이 말은 신명기 15:11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가 곁에 있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 나병환자 시몬: 그가 누구이며 나사로 집안과 어떤 관계인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의 추측이다.
한국 교회에서
"옥합을 깨뜨리다"라는 말은 한국 교회에서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이 본문은 고난주간 설교와 헌신·봉헌을 주제로 한 설교에 자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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