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
역사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끝날 무렵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언한 사건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종말론과 관련해 자주 언급되며, 신학 전통마다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다.
배경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렸다. 그 뒤 유대인은 오랜 세월 독립 국가 없이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흩어져 사는 유대인 공동체를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심해지자 유대인의 민족 국가를 세우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테오도어 헤르츨은 1896년 『유대인 국가』를 펴냈고,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대회를 열었다.
전개
-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 제1차 세계대전 뒤: 국제연맹이 영국에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맡겼다. 이 시기 유대인 이주가 늘면서 아랍 주민과의 충돌도 잦아졌다.
- 1939~1945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국제 여론이 커졌다.
-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UN) 총회가 분할안(결의 181호)을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고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 아래 두는 내용이다. 유대인 측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랍 측은 거부했다.
-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이 곧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 1948~1949년: 이집트·트랜스요르단·시리아·이라크 등 주변 아랍 국가가 개입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1949년 휴전협정으로 이스라엘은 분할안보다 넓은 지역을 차지했고, 같은 해 UN 회원국이 되었다.
결과와 영향
전쟁 중 70만 명 안팎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살던 곳을 떠나 난민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독립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인은 '나크바'(대재앙)로 기억한다. 난민 귀환, 예루살렘의 지위, 국경 문제는 이후 거듭된 중동전쟁과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가운데에는 기독교인도 있다.
평가
기독교 안의 해석
- 세대주의: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하고, 구약의 땅 약속이 민족 이스라엘에게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에 따라 1948년 건국을 성경 예언의 성취이자 재림이 가까웠다는 표징으로 해석한다. 마태복음 24:32-34의 무화과나무 비유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이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이 이해는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기독교 시온주의로 이어졌다.
- 언약신학과 개혁주의 전통: 이 전통은 구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갈라디아서 3:26-29). 그래서 현대 국가의 수립을 예언 성취로 보는 데 신중하다. 다만 이 전통 안에서도 로마서 11장을 근거로 장차 유대인이 대거 회심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 팔레스타인·아랍 기독교인과 에큐메니칼 진영: 팔레스타인과 아랍 지역의 기독교인,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등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건국과 그 뒤의 역사를 난민·인권·정의의 문제로 본다. 이들은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왔다.
한국 교회
한국 교회에서 이스라엘 건국은 부흥회와 종말론 설교에서 종말의 징조로 자주 언급되어 왔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활발하다. 한편 성경 예언을 현대 정치와 곧바로 연결하는 해석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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