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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무렵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이 유럽 유대인 약 600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전후 교회가 반유대주의와 대체신학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온전히 태워 바치는 제물', 곧 번제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고도 부른다.

유럽에는 유대인을 미워하고 차별하는 반유대주의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교회 안에도 유대인을 '그리스도를 죽인 백성'으로 보는 전통이 이어졌다. 마르틴 루터는 말년의 저작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1543)에서 유대인을 거칠게 공격했고, 나치는 이 글을 선전에 이용했다. 19세기 이후에는 유대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인종주의가 여기에 더해졌다.

전개

  •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었다.
  • 1935년: 뉘른베르크법으로 유대인의 시민권을 빼앗고 비유대인과의 결혼을 금지했다.
  • 1938년 11월: '수정의 밤' 사건으로 독일 곳곳의 회당과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었다.
  • 1939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뒤 점령지 유대인을 게토(격리 거주 구역)에 가두었다.
  • 1941년: 소련 침공과 함께 특수기동대가 유대인을 대량으로 총살했다.
  •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럽 유대인을 없애는 '최종 해결'의 실행이 논의되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링카 등 절멸수용소에서 가스를 이용한 학살이 본격화되었다.
  • 1945년: 1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했고, 5월 독일의 항복으로 학살이 끝났다.

롬인(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정치범, 여호와의 증인 신자 등도 박해와 학살을 당했다.

결과와 영향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1946)에서 나치 지도자들이 처벌되었다. 1948년 국제연합은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채택했고, 같은 해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국제연합은 아우슈비츠 해방일인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정했다.

나치 시기 독일 개신교는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나치에 동조한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이었다. 다른 한쪽은 1934년 바르멘 신학 선언으로 교회의 독립을 지키려 한 고백교회였으며, 이 선언의 초안은 칼 바르트가 주도해 썼다. 고백교회의 디트리히 본회퍼는 저항운동에 가담했다가 1945년 4월 처형되었다. 1945년 10월 독일 개신교 지도부는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했다. 천주교는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 「우리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 전체에 돌리는 것을 거부했다.

전후 여러 교회와 신학자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대체신학을 다시 검토했다. 이들은 로마서 11장 28-29절 등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다시 읽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본회퍼의 저작과, 유대인을 숨겨 주다 수용소에 갇혔던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 코리 텐 붐의 자전적 기록 등을 통해 이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

평가

교회의 책임을 두고는 견해가 갈린다.

  • 한쪽은 나치 이념이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인종주의였다고 강조한다.
  • 다른 쪽은 교회의 오랜 반유대 전통이 학살의 토양을 제공했다고 본다.

고백교회도 유대인 박해 자체에는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이 유대인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숨겨 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대체신학을 둘러싼 평가도 엇갈린다. 세대주의 쪽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는 처지에서 대체신학을 비판해 왔다. 언약신학 쪽 일부는 교회와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말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없고,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반론한다.

홀로코스트가 없었거나 부풀려졌다는 부정론은 역사학계에서 사료로 반박되어 왔으며,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는 법으로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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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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