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종교개혁
역사
반종교개혁은 16~17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응하고 내부를 쇄신한 움직임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예수회의 활동이 그 중심이었다.
배경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독일, 스위스, 북유럽, 잉글랜드로 퍼졌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는 많은 지역과 신자를 잃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폐단을 고치자는 요구가 있었다. 대표적인 폐단은 성직 매매(돈으로 성직을 사고파는 일), 주교가 자기 교구에 머물지 않는 관행, 성직자의 교육 부족이었다. 반종교개혁은 개신교에 맞선 대응과 교회 내부의 쇄신이 겹친 움직임을 가리킨다.
전개
- 새 수도회의 등장: 카푸친회 같은 새 수도회가 생겨났다. 특히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세운 예수회를 승인했다.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에 힘을 쏟아 반종교개혁의 대표 세력이 되었다.
- 종교재판소 재편(1542년): 바오로 3세는 이단 문제를 다루는 로마 종교재판소를 다시 정비했다.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세 차례 회기에 걸쳐 열려 가톨릭 교리와 제도를 정리했다. 주요 결정은 다음과 같다.
- 성경과 교회의 전승(성전)을 함께 계시의 근거로 삼았다.
- 개신교가 외경으로 보는 책들을 포함한 정경 목록을 확정했다.
- 불가타를 공적 본문으로 인정했다.
- 칭의를 은총에 의한 내적 갱신이자 인간의 협력이 따르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정죄했다.
- 일곱 성사와 화체설(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가 바뀐다는 교리)을 재확인했다.
-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을 규정했다.
- 후속 조치: 1559년 금서 목록이 공포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566년 『로마 교리서』, 1570년 『로마 미사경본』이 나왔다.
결과와 영향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가톨릭 지역으로 남거나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섰다. 유럽은 신앙에 따라 갈라졌고, 종교 대립은 정치 문제와 얽혀 30년 전쟁(1618~1648년)의 한 요인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해외 선교도 활발해졌다. 1549년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했고,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천주실의』를 썼다. 이 책을 비롯한 서학 서적이 조선에 전해진 것이 조선 천주교 수용의 배경이 되었다.
예술에서는 신앙의 감동을 강조한 바로크 양식이 이 시기 가톨릭 지역에서 크게 발달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세운 체제는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까지 가톨릭교회의 기본 틀로 이어졌다.
평가
용어: 개신교 역사서는 주로 '반종교개혁' 또는 '대항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쓴다. 가톨릭 쪽은 이 시기를 '가톨릭 개혁'으로 부르기도 한다. 20세기 가톨릭 교회사가 후베르트 예딘은 개신교에 대한 대응과 자발적 쇄신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신교 쪽의 시각: 장로교를 비롯한 개혁주의 전통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칭의 교리에서 종교개혁의 핵심을 정죄해 두 교회의 차이를 굳혔다고 본다.
가톨릭 쪽의 시각: 성직자 교육, 교회 기강, 선교 열정을 되살린 쇄신기로 평가한다.
최근의 대화: 1999년 루터교세계연맹과 가톨릭교회는 칭의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세계감리교협의회 등도 여기에 참여했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쪽이 이를 대화의 진전으로 본다. 반면 보수적 개혁주의 쪽은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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