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장 17절
성경 구절 · 같은 말: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본문은 보호 기간이 끝난 개역한글판(1961)입니다. 개역개정·새번역 등 다른 번역본과는 낱말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는 흐름에서 "주는 영"이며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의미를 다룰 때 자주 인용되고 논의된다.
문맥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의 3장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을 변호하면서, 돌판에 새긴 옛 언약과 마음에 성령으로 쓴 새 언약을 대조하고 "율법 조문"과 "영"을 맞세운다(3:3-6). 이어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가린 장면을 끌어온다. 바울은 지금도 옛 언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으나 "주께로 돌아가면" 벗겨진다고 말한다(3:16). 17절은 여기서 말한 '주'가 누구인지 풀이하는 대목이다. 이 흐름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18절로 이어진다.
해석
- 본문 풀이로 보는 읽기: 16절의 '주'는 출애굽기 34:34에서 모세가 나아간 주(야훼)를 가리키고, 바울은 그 주를 오늘 만나는 길이 성령이라고 설명한다고 보는 견해다. "주는 영이시니"를 존재가 같다는 등식이 아니라 구약 본문에 대한 해설로 읽는다. 많은 주석가가 이 읽기를 지지한다.
-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로 보는 읽기: 바울서신에서 '주'는 대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구절을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함께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교단들은 같은 절에 "주의 영"이라는 표현이 함께 있어 둘이 구별된다는 점을 들어, 이 구절이 위격(삼위 하나님 각각의 인격)을 섞은 말이 아니라 두 위격이 하나로 일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 자유의 내용: 문맥에서 자유는 수건에 가려진 상태와 "정죄의 직분"(3:9)에서 벗어나, 담대하게(3:12)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유다. 개혁교회와 루터교 전통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놓인 자유에 강조점을 두는 편이다. 웨슬리 전통과 오순절 계열은 18절과 이어 읽으며, 성령이 죄의 지배에서 풀어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화의 자유를 더 강조하는 편이다.
논쟁과 쟁점
- 양태론과의 관계: 성부·성자·성령을 한 분의 세 가지 모습으로 보는 양태론 쪽에서 "주는 영"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드는 경우가 있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대부분의 교단은 이 문장이 본문 해설이라는 점과 "주의 영"이라는 구별을 들어 이 읽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문맥을 떠난 인용이라는 지적: 이 구절은 예배 형식의 자유나 사회적 해방을 말하는 근거로도 인용된다. 이에 대해 본문의 자유는 옛 언약의 수건이 벗겨지는 일을 말하므로 범위를 지나치게 넓혔다는 지적이 있다. 인용하는 쪽은 성령이 주는 자유가 삶 전반에 미친다고 본다.
- 번역: 그리스어 원문의 '자유'는 '엘류테리아'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자유"로, 개역한글은 "자유함"으로 옮겼다. 한국어 '영'은 영어처럼 대소문자로 성령과 영적 원리를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3장 앞부분과 이어 읽어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는 집회와 은사주의 계열의 찬양 예배에서 예배의 자유로움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된다. 18절과 함께 성화를 주제로 한 설교 본문으로도 자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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