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 운동
역사
밀러 운동은 19세기 전반 미국에서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 윌리엄 밀러가 1843~1844년경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고하면서 일어난 초교파 종말 신앙 운동이다.
배경
19세기 초 미국 동북부에서는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부흥 집회와 새로운 종교 운동이 활발했다. 이 시기 개신교의 주류 종말론은 세상이 점차 나아져 천년왕국이 온 뒤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후천년설이었다. 뉴욕주 농부이자 침례교 평신도였던 윌리엄 밀러(1782~1849)는 이신론(신이 세상을 만든 뒤 간섭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선 뒤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재림이 천년왕국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전천년설의 입장에 섰다.
밀러는 다니엘 8:14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구절에 주목했다. 그는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보는 '일일 일년 원칙'(민수기 14:34, 에스겔 4:6 근거)을 적용했다. 그리고 에스라 시대 예루살렘 재건 칙령의 해로 본 기원전 457년부터 2,300년을 셈하여, 1843년 무렵 그리스도가 재림해 땅을 불로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전개
- 1831년 무렵: 밀러가 공개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 1839~1840년: 출판인 조슈아 하임스가 합류해 정기간행물 「시대의 징조」(Signs of the Times)를 펴냈다. 이후 대규모 천막 집회와 문서 보급으로 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 1842년: 예언 연대를 그림으로 정리한 '1843년 도표'가 만들어져 집회에서 널리 쓰였다.
- 1843~1844년: 밀러는 재림 시기를 유대력에 따라 '1843년 3월 21일부터 1844년 3월 21일 사이'로 좁혔다. 기존 교회들과 갈등이 커지면서 교회를 떠나거나 출교된 신자가 적지 않았다.
- 1844년 여름: 그 시한이 지나자 새뮤얼 스노가 구약의 속죄일에 맞추어 1844년 10월 22일을 새 날짜로 제시했다. 이른바 '제7월 운동'이 빠르게 퍼졌고, 밀러도 막바지에 이 날짜를 받아들였다.
추종자 수는 수만에서 1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와 영향
1844년 10월 22일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간 사건을 대실망(Great Disappointment)이라 부른다. 이후 운동은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신앙을 버리거나 원래 교회로 돌아갔고, 남은 이들은 여러 재림파 집단으로 나뉘었다.
- 재림 날짜 계산의 오류를 인정하면서 재림 신앙을 이어 간 쪽은 뒷날 '재림 그리스도교회'(Advent Christian Church) 등을 이루었다.
- 다른 한 무리는 1844년에 일어난 일을 땅의 정결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들어가 심판 사역을 시작한 사건으로 재해석했다. 이 해석이 '조사심판' 교리로 발전했다. 이들은 토요일 안식일 준수를 받아들여 1863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조직했다.
- 찰스 테이즈 러셀 등 후대 성경연구생 운동도 재림파 설교자들에게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은 여호와의 증인의 뿌리가 되었다.
평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밀러 운동을 자기 교회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날짜 계산은 틀렸지만 예언 해석의 큰 틀과 재림 신앙의 각성은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반면 장로교·감리교 등 여러 개신교 교단과 비평가들은 이 운동을 재림의 날짜를 정하는 '시한부 종말론'의 대표 사례로 든다. 이들은 마가복음 13장 32-33절이나 사도행전 1장 7절처럼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다. 1844년의 재해석을 두고도, 실패한 예언을 사후에 정당화한 것이라는 비판과 성경적 성소 이해라는 재림교회의 반론이 맞서 왔다.
한편 신자들이 승천복을 입고 언덕에 올랐다는 식의 일화는 후대 연구에서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운동을 19세기 미국의 종교적 열기를 보여 주는 사례로 다룬다. 한국에서는 1992년 휴거 소동 등 시한부 종말론 사건이 일어날 때 비교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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