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리
역사
시카리는 1세기 중반 로마 통치 아래의 유대 땅에서 단검으로 정적을 암살하며 로마와 친로마 유대 지배층에 맞선 무장 집단이다. 유대 전쟁 때 마사다 요새를 근거지로 삼았다.
배경
'시카리'(라틴어 sicarii, 단수 sicarius)는 '시카'(sica)라 불린 굽은 단검을 쓰는 사람, 곧 '자객·암살자'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로마에서는 살인자를 가리키는 일반 낱말이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말을 로마 통치 말기에 유대 땅에서 활동한 특정 집단의 이름으로 썼다. 이 집단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에서 나온다.
요세푸스는 이들의 사상적 뿌리를 서기 6년 무렵 로마의 인구 조사에 반대해 봉기한 갈릴리 사람 유다에게서 찾는다(사도행전 5:37). 유다는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며 로마에 세금 내기를 거부했다. 요세푸스는 이 흐름을 바리새파·사두개파·에세네파와 구별되는 '네 번째 철학'이라 불렀다.
전개
- 50년대: 로마 총독 벨릭스가 다스리던 시기에 처음 나타났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들은 명절에 모인 군중 속에서 옷 속에 숨긴 단검으로 상대를 찌르고 군중에 섞여 사라졌다. 요세푸스는 전직 대제사장 요나단을 첫 희생자로 꼽는다. 주된 표적은 로마에 협력한다고 여긴 유대 지배층이었다.
- 60년대 초: 요인을 납치한 뒤, 붙잡힌 동료를 풀어 주면 인질을 돌려보내겠다고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 66년: 유대 전쟁이 일어나자 갈릴리 유다의 자손으로 알려진 므나헴이 마사다 요새의 무기고를 차지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반란 지도자로 행세했고,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이 무렵 그의 무리에게 죽었다. 그러나 므나헴은 다른 반란 세력과 충돌해 살해되었다. 남은 무리는 그의 친척 엘르아살 벤 야일을 따라 마사다로 물러났다.
- 전쟁 중: 이들은 마사다에 머물렀다. 요세푸스는 이들이 유월절에 엔게디를 습격해 700여 명을 죽였다고 적는다.
- 73년 또는 74년: 로마군이 마사다를 포위했다. 요세푸스는 함락 직전에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한다.
결과와 영향
마사다가 함락된 뒤 일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구레네로 피해 반로마 봉기를 부추겼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곳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이 이들을 로마 당국에 넘겼고, 이들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신약성경에도 이 이름이 나온다. 사도행전 21:38에서 로마 천부장은 바울을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으로 오해한다. 여기서 '자객'은 그리스어 '시카리오이'를 옮긴 말이다. 가룟 유다의 '가룟'(이스가리옷)이 시카리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수설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리욧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평가
열심당과의 관계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예전에는 시카리를 열심당 안의 과격파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두 집단을 다른 이름으로 구분해 썼다는 점을 들어, 서로 다른 집단으로 보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
요세푸스는 반란에 가담했다가 로마 편으로 넘어간 인물이다. 그래서 반란 세력을 '강도'로 그리는 경향이 있고, 그의 서술에 과장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마사다 집단 자결 기록도 1960년대 발굴 이후 고고학 자료와 견주며 논의되고 있다.
마사다는 현대 이스라엘에서 항전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시카리는 동족 살해를 서슴지 않은 극단 세력이었다는 평가도 함께 받는다. 교회에서는 시카리를 예수와 초대교회 시대 유대 사회의 정치적 긴장을 이해하는 배경으로 다룬다. 관련 시대 배경은 신구약 중간기 문서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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