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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론파(Remonstrants)는 1610년 네덜란드에서 칼뱅주의 예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섯 조항의 '항의서'를 낸 아르미니우스 계열 개혁교회 목회자들과 그 후예를 가리킨다.

배경

16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국교에 가까운 지위의 개혁교회가 중심 교회였다. 레이던 대학 신학 교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는 장 칼뱅의 후계자들이 가르친 예정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할지 미리 정했다는 가르침이다. 아르미니우스는 같은 대학 교수 고마루스(Gomarus)와 이 문제로 논쟁했다. 그는 1609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견해를 따르는 목회자들이 남았다.

전개

  • 1610년: 요하네스 위텐보가르트 등 목회자 40여 명이 홀란트 주 의회에 다섯 조항의 '항의서(Remonstrance)'를 냈다. 여기서 '항론파'(항의하는 사람들)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에 맞선 칼뱅주의 쪽은 '반항론파'로 불렸다.
  • 항의서의 요지는 다섯 가지이다.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했다.
  •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으나, 용서를 실제로 누리는 사람은 믿는 사람뿐이다.
  •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 은혜는 거부할 수 있다.
  • 신자가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지는 성경을 더 살펴야 한다며 판단을 열어 두었다.
  • 1611년: 헤이그에서 양측 토론회가 열렸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 논쟁은 정치 갈등과 얽혔다. 홀란트의 정치 지도자 올덴바르네벨트는 항론파를 지지했고, 총독 마우리츠는 반항론파 편에 섰다. 1618년 마우리츠는 올덴바르네벨트와 법학자 흐로티위스(그로티우스)를 체포했고, 올덴바르네벨트는 1619년에 처형되었다.
  • 1618~1619년: 도르트레흐트에서 전국 교회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잉글랜드 등 외국 개혁교회 대표도 참석했다. 시몬 에피스코피우스가 이끈 항론파는 피고 자격으로 불려 나왔다가 회의장에서 퇴장당했다. 회의는 항의서를 배격하고 도르트 신조를 채택했다.

결과와 영향

많은 항론파 목회자가 면직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1619년 안트베르펜에서 '항론파 형제단'을 세웠다. 1625년 마우리츠가 죽은 뒤 박해가 점차 누그러졌고, 암스테르담에 교회와 신학교를 열었다. 이 교회는 지금도 네덜란드에 작은 교단으로 남아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주의적 성격이 짙어졌다.

항론파의 사상은 아르미니우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퍼졌다. 18세기 존 웨슬리는 이를 받아들여 웨슬리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도르트 신조의 다섯 응답은 훗날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요약되었다. 다섯 응답은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이다. 항론파도 은혜 없이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따라서 쟁점은 타락 자체보다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한국에서는 '알미니안'이라는 표기도 널리 쓰인다.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도르트 신조를 개혁주의 교육에서 자주 다룬다. 감리교와 성결교 등 웨슬리 전통 교단은 선행 은총 교리를 통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취한다. 침례교와 오순절 계열은 교회와 신학자마다 입장이 다양하다.

평가

개혁주의 쪽은 도르트 회의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지켜 냈다고 본다. 또 항론파의 주장은 구원을 사람의 결정에 기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웨슬리 전통과 아르미니우스주의 쪽은 항론파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책임을 지키려 했다고 평가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논쟁이 국가 정치와 깊이 얽혀 처형과 추방으로 끝난 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항론파 인사들이 종교적 관용 논의에 기여한 점도 주목한다. 이 논쟁은 오늘날 예정과 자유의지 논의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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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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