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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니케아 공의회

역사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787년 동로마 제국의 니케아에서 열린 공의회이다. 성상 파괴 논쟁 가운데 성상 공경을 다시 인정했고, 천주교와 정교회는 이를 일곱째 세계 공의회로 받아들인다.

배경

8세기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도와 성인을 그린 성상(聖像, 이콘이라고도 하며 예배에 쓰는 거룩한 그림)을 두고 큰 논쟁이 일었다. 황제 레오 3세는 720~730년대에 성상 공경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때인 754년에는 히에리아 회의가 성상 제작과 공경을 정죄했다. 성상을 반대한 쪽은 이것이 십계명이 금한 우상 숭배라고 주장했다. 성상을 옹호한 쪽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 덕분에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맞섰다. 옹호 쪽의 대표적 신학자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다.

전개

  • 786년: 섭정 황후 이레네와 어린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성상 반대파 군인들이 난입해 회의가 해산되었다.
  • 787년: 회의 장소를 니케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니크)로 옮겨 다시 열었다. 의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타라시오스였고,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도 사절을 보냈다. 참석한 주교는 300명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회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렸다.

공의회는 754년 히에리아 회의의 결정을 무효로 하고 성상 공경을 다시 인정했다. 이때 두 가지 공경을 구별했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그리스어 라트레이아)과, 성상에 표하는 존경과 경배(프로스키네시스)이다. 공의회는 성상에 바치는 공경이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이 나타내는 대상에게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교회 질서에 관한 교회법 조항도 함께 정했다.

결과와 영향

공의회 뒤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815년 황제 레오 5세 때 성상 파괴 정책이 다시 시행되었다. 843년 황후 테오도라 때에 이르러서야 성상 공경이 최종적으로 회복되었다. 정교회는 이를 '정교의 승리'로 기념한다.

서방의 반응은 엇갈렸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측은 이른바 『카롤루스의 책』에서 공의회 결정을 비판했고, 794년 프랑크푸르트 회의도 이를 거부했다. 이 반발에는 공의회 문서의 라틴어 번역이 부정확했던 점이 작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후 로마 교회는 이 공의회를 받아들였다.

평가

  • 정교회와 천주교: 이 공의회를 일곱째 세계 공의회로 인정한다. 정교회에서 이 공의회는 이콘 신학의 근거로 특히 중요하다.
  • 개신교: 대체로 이 공의회의 결정을 구속력 있는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교단 전통에 따라 입장의 강도가 다르다.
  • 개혁교회와 장로교 전통: 장 칼뱅은 교회 안의 형상을 비판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을 형상으로 나타내는 일과 교회에 형상을 두는 일을 금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포함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도 형상을 통한 예배를 금한다.
  • 루터교: 마르틴 루터는 형상 파괴에 반대했으며, 루터교는 예배당에 십자가상 등을 두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 성공회: 39개 신조는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밝힌다.

한국 개신교회는 대부분 예배당에 성상을 두지 않는다. 장식 없는 십자가 상징을 주로 쓰는 것도 이러한 개신교 전통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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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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