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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장 18절

성경 구절 · 같은 말: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본문은 보호 기간이 끝난 개역한글판(1961)입니다. 개역개정·새번역 등 다른 번역본과는 낱말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 안에서 온전해지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구절이다. 구원의 확신을 다룰 때, 그리고 웨슬리 전통의 '온전한 사랑' 교리와 관련해 자주 인용된다.

문맥

요한일서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쓴 편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저자 문제를 두고는 학계에 여러 견해가 있다. 편지를 받은 공동체는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가르침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요한일서 4:2-3).

4장 7절부터 21절까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4:8, 16)는 고백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을 펼친다. 바로 앞 17절은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결과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18절은 이 흐름을 이어받아 사랑과 두려움이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구절의 '두려움'은 일차적으로 최후의 심판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으로 읽힌다. '형벌'로 옮긴 헬라어 '콜라시스'는 징벌을 뜻한다.

해석

  • '온전한 사랑'의 주체를 둘러싼 읽기: 이 사랑이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신자의 사랑인지를 두고 주석가들의 견해가 나뉜다. 둘 다를 아우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근거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12절과 17절의 표현이 함께 거론된다.
  • 구원의 확신과 연결하는 읽기: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신자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함을 얻는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읽기: 그는 요한일서 강해에서 형벌을 두려워하는 '종의 두려움'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순결한 두려움'을 구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앞의 두려움이 사랑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한 뒤 물러난다고 보았다.
  • 웨슬리 전통의 읽기: 존 웨슬리는 '온전한 사랑(perfect love)'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설명하는 핵심 표현으로 사용했다. 이 구절은 그 근거 본문 가운데 하나로 쓰인다. 감리교와 성결교 등 웨슬리 신학을 잇는 교단은 이를 성화와 성결의 가르침과 연결해 설명한다.

논쟁과 쟁점

  • 경외와의 관계: 성경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언 9:10),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2)처럼 두려움을 긍정하는 구절도 있다. 이 때문에 18절이 내쫓는 두려움을 형벌에 대한 공포로 한정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외와는 구별하는 설명이 널리 쓰인다.
  • '온전함'의 범위: 웨슬리 전통은 이 땅에서 온전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반면 개혁주의 전통은 그런 완전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 문맥을 떠난 인용: 이 구절은 불안이나 공포 일반을 이기는 심리적 위로로 인용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본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는 문맥을 넘어선 적용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설교에서 구원의 확신, 신앙생활의 담대함, 불안을 극복하는 문제를 다룰 때 자주 인용된다. 성결교와 감리교 계열에서는 성결과 온전한 사랑을 설명하는 본문으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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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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