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
인물
메리 1세(1516~1558)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재위 1553~1558)이다. 잉글랜드에 천주교를 되살리고 개신교인을 처형하여, 망명한 개신교인들이 제네바 성경을 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생애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와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8세는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갈라섰고,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혼인이 무효로 선언되어, 메리는 한동안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다. 그러나 메리는 어머니의 신앙인 천주교를 평생 지켰다.
1553년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세력은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메리는 지지 세력을 모아 왕위에 올랐다. 1554년에는 스페인 왕자 펠리페(뒤의 펠리페 2세)와 혼인하였다. 이 혼인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메리는 1558년에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났고,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뒤를 이었다.
사역과 업적
메리 1세는 에드워드 6세 때 추진된 개신교 종교개혁을 되돌렸다. 1554년에 잉글랜드 교회를 다시 로마 교황청 아래로 돌려놓았고, 라틴어 미사를 복원하였다. 이단(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처벌하는 옛 법도 되살렸다.
이 법에 따라 1555년부터 개신교인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처형된 사람은 약 280~300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와 주교 휴 래티머, 니컬러스 리들리도 있었다. 처형된 이들 상당수는 화체설을 부인한 것이 죄목이었다. 화체설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교리이다.
많은 개신교인은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을 흔히 '메리 시대 망명자'라 부른다. 제네바에 머문 망명자들은 장 칼뱅의 영향 아래에서 제네바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 성경은 신약이 1557년에, 전체가 1560년에 나왔다. 당시 제네바에서 목회하던 존 녹스는 1558년 여성 통치자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써서 메리를 공격하였다. 존 폭스가 1563년에 펴낸 『행전과 기념물』(흔히 '순교자 열전'으로 불림)은 이 시기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렸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메리 1세가 한국 교회에 직접 끼친 영향은 없다. 다만 그의 시대에 망명한 개신교인들은 제네바에서 칼뱅주의를 익히고 돌아왔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 운동과 스코틀랜드 장로교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흐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졌고, 한국 장로교 여러 교단이 이 신앙고백을 표준 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메리 시대의 박해와 망명은 한국 장로교 전통의 먼 배경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평가
개신교 쪽에서는 오랫동안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칭과 함께 박해자로 기억해 왔다. 폭스의 순교자 이야기가 이런 인식을 굳히는 데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 쪽과 일부 역사학자들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이들은 메리가 당대 유럽의 이단 처벌 관행을 따랐으며, 종교 문제로 사람을 처형한 일은 다른 통치자들에게서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 메리 시대에 진행된 교회 쇄신의 노력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반면 처형의 규모와 집중성은 짧은 재위 기간에 비해 이례적이었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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