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역사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1세기 네로 때부터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로마 당국이 그리스도인을 처벌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한 일을 말한다.
배경
로마 제국은 여러 민족의 신을 비교적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다만 국가의 신들과 황제에게 바치는 제의(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시민의 충성 표시로 여겼다. 유대교는 오래된 민족 종교로 인정받아 어느 정도 예외를 누렸지만, 유대교와 구별되기 시작한 기독교에는 그런 지위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신과 황제를 섬기는 일을 우상 숭배로 보고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비공개로 모이던 성찬과 애찬은 인육을 먹는다거나 문란하다는 소문으로 왜곡되었다.
전개
- 64년 네로: 로마 대화재 뒤 네로가 그리스도인에게 책임을 돌려 처형했다. 이 일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교회 전승은 베드로와 바울이 이 무렵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 112년 무렵 트라야누스: 총독 소(小)플리니우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원칙을 밝혔다. 그리스도인을 일부러 찾아내지는 말되, 고발되었는데도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2세기에는 이 원칙 아래 지역별 박해가 이어졌다.
- 250년 데키우스: 모든 주민에게 신들에게 제사하고 증명서를 받도록 명령했다. 처음으로 제국 전역에 걸친 박해였다.
- 257~258년 발레리아누스: 성직자와 교회 집회를 겨냥한 칙령을 내렸다. 258년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가 순교했다.
- 303~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교회 건물 파괴, 성경 몰수, 성직자 체포가 잇따랐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관용 칙령을 내렸고,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이른바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결과와 영향
박해가 끝난 뒤 교회는 신앙을 버렸다가 돌아오려는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일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데키우스 박해 뒤에는 이 문제로 노바티아누스파가 갈라져 나갔다. 대박해 때 성경을 넘겨준 성직자의 자격 문제는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 분열로 이어졌다. 순교자를 기념하는 전통도 이 시기에 자리 잡았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 신앙을 따르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다.
평가
에우세비오스와 락탄티우스의 기록은 박해를 전하는 핵심 자료이다. 후대에는 박해를 '10대 박해'로 세는 전통도 생겼다. 현대 역사학은 대체로 제국 차원의 조직적 박해는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에 한정되었고, 그 밖의 박해는 지역적·간헐적이었다고 본다. 순교자 수는 학자마다 추정이 크게 다르다.
한국 교회에서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맞선 일을 로마 황제 제의 거부에 빗대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로마의 지하 묘지(카타콤)도 성지순례 일정에 자주 들어간다. 카타콤은 흔히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구자들은 주로 매장과 추모의 장소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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