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
역사
카타콤은 고대 로마 등지에서 초기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등이 사용한 지하 공동묘지이다. 박해 시대 신앙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초대교회의 매장 풍습과 미술을 보여 주는 자료로 연구된다.
개요
카타콤(catacomb)은 땅속에 좁은 통로를 파고 벽면에 시신을 안치한 지하 묘지이다. 로마의 카타콤이 가장 유명하며, 나폴리·시칠리아·북아프리카 등지에도 있다. 이름은 로마 아피아 가도 근처의 지명 '아드 카타쿰바스(ad catacumbas)'에서 왔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이곳 묘지만 가리켰으나, 뒤에 지하 묘지 전체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배경
로마법은 도성 안에 시신을 묻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서 무덤은 성 밖 큰길가에 만들어졌다. 당시 로마에서는 화장이 흔했지만 그리스도인은 부활 신앙에 따라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을 택했다. 로마 주변의 땅은 응회암(화산재가 굳은 무른 돌)이어서 파기 쉬웠다. 땅값이 비싼 도시에서 많은 사람을 묻을 수 있도록 지하로 여러 층의 통로를 넓혀 나갔다.
전개
- 2세기 말~3세기 초: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동묘지가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대표적인 칼리스토 카타콤은 3세기 초 로마 교회가 관리를 맡긴 묘지이며, 3세기 로마 주교 여러 명이 이곳에 묻혔다.
-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 주교 식스투스 2세가 묘지에서 모임을 이끌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 313년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자 카타콤은 순교자의 무덤을 찾아 기념하는 장소가 되었다. 4세기 로마 주교 다마수스 1세는 순교자 묘를 정비하고 비문을 새겼다.
- 5세기 이후: 지하 매장은 점차 줄었다. 전쟁과 약탈을 거치며 유해가 도성 안 교회로 옮겨졌고, 중세에는 카타콤 대부분이 잊혔다.
- 1578년 이후: 살라리아 가도에서 카타콤이 우연히 다시 발견되었다. 17세기 안토니오 보시오와 19세기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가 연구해 근대 기독교 고고학의 바탕을 놓았다.
결과와 영향
카타콤 벽에는 초기 기독교 미술이 남아 있다. 양을 어깨에 멘 선한 목자, 물고기, 닻, 비둘기, 두 팔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요나, 노아, 사자굴 사건처럼 구원을 주제로 한 성경 장면도 자주 그려졌다. 오늘날 로마의 카타콤 일부는 일반에 공개되어 있으며, 한국 교인들의 성지순례에서도 자주 찾는 곳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와 신앙 서적에서는 카타콤이 박해를 견딘 초대교회의 상징으로 자주 쓰인다. 박해 아래 숨어서 모이는 북한 교회나 중국 가정교회를 '카타콤 교회'에 빗대어 부르기도 한다.
평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 숨어 살았다거나 정기 예배를 주로 그곳에서 드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를 과장된 이해로 본다. 로마 당국도 카타콤이 묘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좁은 통로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에 알맞지 않았다. 그곳에서 행해진 일은 주로 장례와, 죽은 이와 순교자를 기념하는 모임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카타콤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통마다 다르다. 천주교는 순교자를 공경하는 성지로 여기며 로마 카타콤을 관리한다. 개신교는 주로 초대교회 신앙과 박해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적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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