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키우스 박해
역사
데키우스 박해는 로마 황제 데키우스가 249년 말 또는 250년 초에 모든 주민에게 신들에 대한 제사를 명령하면서 일어난 그리스도인 박해이다. 제국 전체에 걸친 첫 조직적 박해로 평가되며, 배교자 처리 문제를 남겼다.
배경
3세기 중엽 로마 제국은 외적의 침입, 잦은 황제 교체, 경제 불안이 겹친 이른바 '3세기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249년 황제가 된 데키우스는 로마 전통 신들에 대한 제사를 되살리면 제국이 안정된다고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은 상태, 곧 '신들의 평화'를 회복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는 대체로 지역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전개
- 249년 말 또는 250년 초: 데키우스는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칙령을 내렸다. 칙령 원문은 남아 있지 않다. 주민은 지역 위원 앞에서 제물을 바치거나 향을 피운 뒤, 이를 확인하는 증서(라틴어 '리벨루스')를 받아야 했다. 이집트에서는 250년 무렵 날짜가 적힌 증서가 파피루스 문서로 수십 점 발견되었다.
- 250년 1월: 로마 주교 파비아누스가 순교했다. 안디옥 주교 바빌라스와 예루살렘 주교 알렉산데르도 옥중에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고, 몇 해 뒤 세상을 떠났다.
-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알렉산드리아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몸을 피한 채 편지로 교회를 이끌었다.
- 251년: 데키우스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하면서 박해는 사실상 끝났다.
결과와 영향
배교자 문제
제사를 거부하고 갇히거나 고문을 받은 사람은 '고백자'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제사에 응했다. 교회는 이들을 '넘어진 자들'(라틴어 '랍시'), 곧 배교자라 불렀다. 실제로 제사한 사람과 돈이나 연줄로 증서만 얻은 사람을 구별하기도 했다.
박해가 끝나자 배교자에게 성찬 참여를 다시 허락할지, 허락한다면 어떤 조건을 둘지가 큰 문제가 되었다. 일부 고백자는 배교자에게 '평화의 편지'를 써 주며 곧바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것이 주교의 권한과 교회 질서를 흔든다고 보았다. 251년 키프리아누스가 주도한 카르타고 회의는 죄의 경중에 따라 일정 기간 공개적인 참회를 거친 뒤 다시 받아들이는 방향을 정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무렵 「배교자에 관하여」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를 썼다.
노바티아누스 분열
같은 해 로마에서는 코르넬리우스가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참회한 배교자를 다시 받아들이는 쪽에 섰다. 로마 교회의 장로 노바티아누스는 배교자를 교회가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에 반대했다. 그는 따로 주교로 세워져 별도의 교회를 이루었고, 이 분파는 여러 세기 동안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역사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제국 전체에 걸친 첫 조직적 박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만 칙령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을 겨냥한 것인지, 모든 주민의 종교적 충성을 확인하려던 조치였는지는 견해가 갈린다. 어느 쪽이든 유일신 신앙 때문에 제사를 거부할 수밖에 없던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는 데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순교자 수는 비교적 적었던 반면 배교자는 많았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교회사에서는 이 박해가 권징과 참회 제도, 주교의 권위, 교회 일치에 대한 논의를 앞당긴 계기로 평가된다. 비슷한 쟁점은 뒤이은 발레리아누스 박해(257~258년, 키프리아누스는 258년에 순교) 때와 4세기 초 대박해 이후에도 다시 불거졌다. 천주교는 파비아누스, 코르넬리우스, 키프리아누스를 성인으로 공경한다. 개신교에서는 이들을 초대교회의 교부와 순교자로 다룬다. 한국 교회에서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와 해방 뒤 참배자의 회개와 복귀를 둘러싼 논쟁을 설명할 때 이 사건이 견주어 언급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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