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카 칙령
역사
테살로니카 칙령은 38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공동 황제들과 함께 반포한 칙령이다.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신앙을 제국의 정통 신앙으로 정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배경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허용되었다. 그 뒤 4세기 교회는 성자가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닌 하나님인지를 두고 오래 논쟁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가 피조물이라고 가르친 아리우스의 주장을 정죄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황제에 따라 아리우스주의에 가까운 입장이 지지를 받았다. 동방을 다스린 발렌스 황제가 그런 예로 알려져 있다.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발렌스가 전사했다.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379년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세웠다.
전개
380년 2월 27일, 그라티아누스·발렌티니아누스 2세·테오도시우스 1세 세 황제의 이름으로 테살로니카에서 칙령이 반포되었다. 칙령은 황제가 내린 명령이다. 이 칙령은 라틴어 첫머리를 따서 "쿤크토스 포풀로스(Cunctos populos, 모든 백성)"라고도 불린다. 형식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칙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백성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인에게 전한 신앙을 따라야 한다. 이 신앙은 로마 주교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 주교 베드로가 지키는 신앙으로 명시되었다.
- 성부·성자·성령이 한 신성과 동등한 위엄을 지닌다고 믿는 이들만 "가톨릭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여기서 '가톨릭'은 특정 교파의 이름이 아니라 '보편 교회'를 뜻하는 말이다.
- 그 밖의 이들은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들의 집회 장소는 교회라 부를 수 없고, 이들은 하나님의 징벌과 황제의 처벌을 받는다.
이 칙령은 뒤에 편찬된 테오도시우스 법전 제16권에 실렸다. 테오도시우스는 같은 해 테살로니카에서 병을 앓던 중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80년 11월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 아리우스파 주교 데모필루스를 물러나게 하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 교회를 맡겼다.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앙을 재확인하고 성령에 관한 고백을 보강했다.
결과와 영향
- 니케아의 삼위일체 신앙이 제국의 공식 기준이 되었다. 이후 아리우스주의는 제국 안에서 쇠퇴했지만, 고트족 등 일부 게르만족 사이에서는 한동안 이어졌다.
- 391~392년에는 이교 제사를 금지하는 법령이 잇달아 나왔다. 이로써 기독교가 사실상 제국의 유일한 공인 종교가 되는 흐름이 굳어졌다.
- 국가가 법으로 바른 신앙을 정하고 이단을 처벌하는 선례가 되었다. 이 선례는 중세의 국가와 교회 결합 체제로 이어졌다.
평가
이 칙령은 흔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나라가 공식으로 정한 종교)가 된 출발점으로 소개된다. 다만 학계에는 다른 견해도 있다. 칙령은 이교를 직접 금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서 정통의 기준을 정한 것이었고,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 좁게 보는 견해다.
교회 전통마다 이 사건을 보는 강조점이 다르다.
- 천주교와 정교회에서는 니케아 신앙이 교회의 공적 신앙으로 자리 잡는 과정의 한 단계로 다루어진다.
- 개신교 주류도 이 칙령이 확인한 삼위일체 신앙을 공유한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등은 오랫동안 국가교회 체제를 이어 갔다.
- 반면 재세례파와 그 흐름을 잇는 자유교회 전통은 국가 권력이 신앙을 강제하고 이견을 처벌한 첫 사례로 보아 비판한다. 이 전통에서는 이 칙령을 교회와 국가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의 역사적 근거로 들기도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나 종교의 자유를 다룰 때 밀라노 칙령과 함께 자주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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