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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회 투쟁

역사 · 같은 말: 나치와 교회

독일 교회 투쟁은 나치 집권기(1933~1945) 독일 교회가 겪은 갈등을 가리킨다. 좁게는 나치를 지지한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과 이에 맞선 고백교회가 개신교의 주도권과 신앙고백을 두고 벌인 싸움을 말한다.

'교회 투쟁'은 독일어 Kirchenkampf를 옮긴 말이다. 이 말은 세 가지 갈등을 함께 가리키거나 그중 하나를 가리킨다. 첫째는 독일 개신교 안에서 '독일 그리스도인'과 고백교회가 교회 주도권을 두고 다툰 내부 갈등이다. 둘째는 나치 정권과 개신교 교회 기구들 사이의 긴장이고, 셋째는 나치 정권과 천주교 사이의 긴장이다. 이 문서는 주로 개신교 안의 갈등을 다룬다.

배경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독일은 승전국의 무거운 배상 요구에 시달렸다. 이 속에서 개신교 보수층 일부가 민족주의로 기울었다. 1932년 나치당이 주도해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 운동이 결성되었다. 이 운동은 민족을 위한 사명을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신앙과 나치 이념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 당시 독일 개신교는 28개 주(州) 교회가 느슨하게 연합한 형태였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이를 '지도자 원리'(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권한을 모으는 나치의 조직 원칙)에 따라 하나의 제국교회로 통합하려 했다.

전개

  • 1933년: 4월 25일 히틀러가 군목 출신 루트비히 뮐러를 개신교 문제 전권위원으로 임명했다. 7월 23일 교회 선거에서는 독일 그리스도인이 크게 이겼다. 9월 27일 비텐베르크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 뮐러가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빙의 뒤를 이어 제국감독(전국 개신교를 이끄는 최고 직책)에 올랐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유대계 혈통의 목회자를 배제하는 '아리안 조항'을 교회법에 넣으려 했다. 같은 9월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베를린 달렘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등과 함께 '목회자 긴급동맹'(Pfarrernotbund)을 세웠다. 이 모임에는 그해 말까지 약 6천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월 13일 베를린 스포츠궁전 집회에서는 독일 그리스도인 측 연설자가 세 가지를 요구했다. 교회가 구약성경을 버리고, 유대계 교인을 내보내고, 바울의 신학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설은 많은 교인의 반발을 샀다. 12월 말에는 뮐러가 교회 청소년 사업을 히틀러 청소년단에 넘겼다.
  • 1934년: 1월 히틀러가 양쪽 교회 지도자를 총리 관저로 불렀지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하노버 주 교회의 감독들은 이 무렵 니묄러와 거리를 두었다. 5월 반대파는 바르멘에서 대회를 열고 칼 바르트가 초안을 쓴 '바르멘 신학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가 듣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며, 국가나 이념은 계시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참된 독일 복음주의 교회라고 선언했고, 이들이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라고 불리게 되었다.
  • 그 뒤: 고백교회는 본회퍼에게 견습 목회자를 가르치는 핑켄발데 신학원을 맡기는 등 따로 목회자를 길러 냈다.

결과와 영향

전쟁이 끝난 뒤 고백교회 지도자들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히틀러에게 더 용기 있게 맞서지 못한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했다. 전후 독일 교회는 바르멘 선언을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 기본 문서로 삼아 왔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뒷날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도 바르멘 선언은 교회의 사회윤리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논할 때 자주 이정표로 언급된다.

평가

고백교회는 교회가 국가 이념에 흡수되기를 거부한 사례로 널리 평가된다. 다른 한편 이런 비판도 있다.

  • 저항이 주로 교회 안의 신앙고백 문제에 머물렀고,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는 거리가 있었다.
  • 바르멘 선언은 나치의 인종 정책을 직접 다루지 않았다.
  • 목회자 긴급동맹은 일반 정치에서는 히틀러 편에 섰다.

고백교회에 참여한 이들은 정치 비판을 일부러 뒤로 미루었다고 설명한다. 교인들이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나치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디트리히 본회퍼는 유대인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히틀러 정권에 맞선 인물로 따로 평가받는다.

신학적 해석도 갈린다. 위르겐 몰트만은 개신교가 발전시켜 온 두 전통, 곧 루터의 두 왕국론과 개혁교회의 그리스도 주권론이 이 시기 교회가 국가를 어떻게 볼지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함께 보기 7

참고한 자료 12곳
  1. Kirchenkampf (영어 위키백과)
  2. Ludwig Müller (Theologe) (독일어 위키백과)
  3. Friedrich von Bodelschwingh (영어 위키백과)
  4. Als Hitler evangelische Kirchenführer zum Empfang lud (katholisch.de)
  5. Evangelische Kirche in der NS-Zeit
  6. Kirchenkampf im Nationalsozialismus
  7. Kirchenkampf und Pfarrernotbund
  8. 독일 고백교회의 저항에 대한 연구 (KCI)
  9. 고백교회 (한국어 위키백과)
  10. 칼 바르트 (한국어 위키백과)
  11. 바르멘 선언과 한국교회의 사회윤리 (교갱뉴스)
  12. 김명용, 칼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의 교회와 국가 (장신논단 35집)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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