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교회
역사
고백교회는 1930년대 나치 독일에서 국가가 교회를 장악하려는 시도에 맞서 독일 개신교 목사와 교인들이 일으킨 교회 운동이다. 1934년 '바르멘 신학 선언'으로 신앙의 기준을 밝혔다.
배경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자, 독일 개신교 안에서 나치 이념을 교회에 받아들이려는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 운동이 힘을 얻었다. 당시 독일 개신교는 루터교, 개혁교회, 연합교회(루터교와 개혁교회가 합친 교회)로 이루어진 여러 주(州) 교회의 연합체였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이 교회들을 하나의 '제국교회'로 묶으려 했다. 또 유대인 혈통의 목사와 교인을 교회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아리안 조항'을 도입하려 했다. 이들은 1933년 7월 교회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했고, 같은 해 9월 루트비히 뮐러가 제국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전개
- 1933년 가을: 베를린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 등이 아리안 조항에 반대하며 '목사긴급동맹'을 만들었다. 수천 명의 목사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34년 5월: 바르멘에서 열린 총회가 '바르멘 신학 선언'을 채택했다. 주로 칼 바르트가 초안을 쓴 이 선언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가 듣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고백한다. 국가나 이념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거짓으로 배격했다. 루터교·개혁교회·연합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했다.
- 1934년 10월: 달렘 총회는 독일 그리스도인이 장악한 교회 지도부를 정당한 교회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별도의 교회 기관을 세우기로 했다.
- 1935~1937년: 고백교회는 목회자를 따로 길렀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끈 핑켄발데 신학교가 대표적이며,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보아 1937년 폐쇄했다. 바르트는 1935년 교수직에서 해임되어 스위스로 돌아갔다. 1937년에는 니묄러가 체포되어 1945년까지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이 과정에서 고백교회 안에서도 국가와 어디까지 타협할지를 두고 온건한 입장과 강경한 입장(달렘 노선)이 갈라졌다.
결과와 영향
많은 목사가 투옥되거나 징집되면서 운동은 점차 약해졌다. 본회퍼는 개인적으로 히틀러 반대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가 1945년 4월 처형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 독일개신교회(EKD) 지도부는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여 나치 시대 교회의 책임을 인정했다. 니묄러 등 고백교회 출신 인사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바르멘 신학 선언은 이후 독일 여러 주 교회와 미국장로교(PC(USA))의 공식 신앙고백 문서에 포함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고백교회가 신사참배 문제와 자주 비교된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주기철 등은 이를 거부하다 투옥되었다. 이 일과 고백교회는 국가 권력 앞에서 교회의 신앙고백을 지킨 사례로 함께 거론된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에는 본회퍼와 바르멘 선언이 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말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고백교회는 교회가 국가 이념에 흡수되는 것을 거부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저항의 초점이 주로 교회의 자율과 교리에 머물렀다는 비판도 있다. 바르멘 선언은 유대인 박해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고, 교회 밖의 유대인을 지키는 데는 충분히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니묄러도 전후에 이 점을 반성했다.
신학적 평가는 입장에 따라 갈린다. 당시 일부 루터교 신학자들은 바르멘 선언이 교회와 국가의 영역을 구분하는 루터교의 두 왕국론과 맞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한국의 보수 개혁주의 진영에는 바르트 신학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선언이 바탕으로 삼은 신학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함께 보기 7
토론 0
이 문서에 대한 의견, 다른 관점, 고칠 점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