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디트리히 본회퍼

인물 · 같은 말: 본회퍼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로, 나치에 맞선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했다. 히틀러 제거 계획에 관여한 혐의로 1945년 처형되었다.

생애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정신과 의사 카를 본회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부터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교회 공동체를 다룬 박사 논문 《성도의 교제》로 칼 바르트의 호평을 받았다. 24세에 교수 자격을 얻은 뒤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또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신 격인 교회 연합 기구에서 청년 담당 목회자로 일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했다. 본회퍼는 국가가 교회에 간섭하는 데 맞선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했고, 고백교회의 목회자 양성 기관인 핑켄발데 신학원을 이끌었다. 신학원이 당국에 의해 문을 닫은 뒤에는 국방군 정보기관(아프베어) 인사들이 추진한 히틀러 제거 계획에 관여했다. 1943년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가 실패한 뒤 가담 혐의가 드러났고,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39세였다.

사역과 업적

  • 교회론: 교회를 그리스도가 함께하는(현존하는) 공동체로 보았다.
  • 제자도: 《나를 따르라》에서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부름에 곧바로 응답하는 '단순한 순종'을 강조했다.
  • 교회의 사회적 책임: 1933년 4월에 쓴 글 「유대인 문제 앞에서의 교회」에서 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다루었다. 교회는 바퀴에 깔린 희생자를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바퀴 자체를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저술: 《행위와 존재》, 《창조와 타락》, 《윤리학》이 있다. 옥중에서 쓴 편지는 그가 죽은 뒤 《저항과 복종》으로 출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옥중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 기념: 성공회는 4월 9일을 그의 기념일로 지킨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1970년대 군사독재 시기에 그의 옥중서신은 감옥에 갇힌 학생·노동자·지식인들에게 큰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본회퍼가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했다고 해석했다. 또 그의 표현을 빌려 민중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정의했다. 제자도와 교회 공동체에 관한 그의 사상은 교단을 가리지 않고 연구된다. 교회의 사회 참여나 한국 교회 갱신을 논할 때에도 자주 인용된다.

평가

나치에 맞서 신앙 양심을 지킨 순교자로 교파를 넘어 존경받는다. 독일 교회에 책임윤리 개념이 뿌리내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목회자가 암살 계획에 관여한 일은 그리스도인이 폭력으로 저항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윤리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국에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의 말이 골라서 인용된다는 지적도 있다. 문재인 정부 시기 전광훈 목사 측은 이른바 '미친 운전자' 비유를 인용해 정부를 비판했다. 이에 본회퍼 연구자들은 그의 뜻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본회퍼가 운전자를 끌어내리자고 직접 말한 적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함께 보기 7

참고한 자료 10곳
  1. 디트리히 본회퍼 - 위키백과
  2. [위클리 교회사] 4월 9일,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순교 - 가스펠투데이
  3.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다시 논하다 - 뉴스앤조이
  4.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와 민중신학 - 에큐메니안
  5. "전광훈 목사의 '미친 자 운전대', 본회퍼의 뜻 왜곡했다" - 시사저널
  6. 본회퍼는 '운전자를 끌어내자'고 말한 적이 없다 - NEWS M
  7.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 나타난 제자의 윤리 - 장로회신학대학교
  8. 핑켄발데 신학원의 교육 - 장로회신학대학교
  9. 평범한 목사가 암살자가 된 이유 - 오마이스타
  10. [김형태 칼럼] 본회퍼 목사의 기도 - 크리스천투데이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4

토론 0

이 문서에 대한 의견, 다른 관점, 고칠 점을 남겨 주세요.

로그인하고 토론에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