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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자 막시무스

인물

고백자 막시무스(약 580~662)는 7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사이자 신학자이다. 그리스도에게 신성과 인성에 따른 두 의지가 있다는 양의론을 변호하다 고문과 유배를 겪어 '고백자'로 불린다.

생애

그리스어 전기는 막시무스가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비서관으로 일했다고 전한다. 시리아어 전기는 그가 팔레스타인 출신이라고 전한다. 이처럼 출생지와 초년의 행적은 사료마다 달라 확실하지 않다.

그는 궁정을 떠나 수도사가 되었다. 620년대에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오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옮겨 갔다. 이 무렵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와 함께 황제가 지지하던 단의론(그리스도에게 의지가 하나뿐이라는 주장)에 맞섰다. 645년에는 카르타고에서 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피로스와 공개 토론을 벌였다. 649년에는 교황 마르티노 1세가 로마에서 연 라테란 공의회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공의회는 단의론을 정죄하였다.

653년 무렵 그는 황제의 명으로 체포되어 재판과 유배를 거듭 겪었다. 662년 마지막 재판에서 혀와 오른손이 잘린 뒤 흑해 동쪽의 라지카로 유배되었고, 같은 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교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지켜 증언했다는 뜻에서 '고백자'라는 칭호가 붙었다.

사역과 업적

막시무스의 핵심 주장은 양의론이다. 양의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므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를 함께 지닌다는 주장이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가 고백한 '두 본성'을 일관되게 따르면 '두 의지'에 이른다고 보았다. 근거로는 겟세마네 기도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39)를 들었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자유롭게 순종한 것으로 읽은 것이다. 그의 사후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가 이 입장을 공인하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암비구아』(난해 구절 해설), 『탈라시오스에게 보낸 질문들』, 교회 예배의 의미를 풀이한 『미스타고기아』, 『사랑에 관한 사백 장』 등이 있다. 그는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의 연합에 참여한다는 '신화(神化, 테오시스)' 사상을 깊이 전개하였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 개신교에서 막시무스의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다. 그는 주로 신학교의 교회사와 기독론 과목에서 단의론 논쟁의 중심인물로 소개된다. 많은 개신교 교단은 초기 공의회가 정리한 기독론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그의 양의론은 개신교 신학에서도 정통 기독론의 일부로 다루어진다. 근래에는 정교회 영성과 교부 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의 저작이 소개되기도 한다.

평가

정교회와 천주교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대표적인 교부로 꼽는다. 20세기에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의 연구 등을 계기로 서방에서도 재조명되었다. 개신교 신학자들도 기독론 논쟁에서 그가 한 공헌은 대체로 높이 평가한다. 다만 신화 사상과 신비주의적 성향을 두고는 시각이 갈린다. 개신교 전통의 칭의·성화 이해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신중히 따져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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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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