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무스
인물
안셀무스(1033년경~1109)는 중세 서방 교회의 신학자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라는 방법과 존재론적 논증, 속죄에 관한 만족설로 알려져 있으며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생애
알프스 남쪽 아오스타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프랑스 지역을 떠돌다가 1060년 무렵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 들어가 베네딕도회 수도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스승 란프랑쿠스의 뒤를 이어 1063년 부원장, 1078년 수도원장이 되었다.
1093년 캔터베리 대주교에 올랐다. 이후 교회 성직자를 누가 임명하는가를 두고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 헨리 1세와 거듭 맞섰고, 이 일로 두 차례 망명 생활을 했다. 1109년 캔터베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주교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1720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사역과 업적
안셀무스는 신앙의 내용을 이성으로 따져 이해하려 했다. 그의 방법은 흔히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라틴어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더 깊이 이해하려 한다는 뜻이다. 이 태도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되며, 이성으로 신학을 체계화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 존재론적 논증: 『프로슬로기온』에서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하고, 그런 존재는 생각 속에만 있을 수 없고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논증했다. '존재론적 논증'이라는 이름은 후대 철학자 칸트가 붙인 것이다.
- 만족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1098년경 완성)에서 죄는 하나님의 영예를 훼손한 것이므로 반드시 보상(만족)되어야 하는데, 그 빚은 인간이 갚아야 하지만 하나님만이 갚을 수 있으므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설명했다. 성육신과 십자가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풀어낸 이 설명은 서방 속죄론의 중요한 틀이 되었다.
- 1098년 바리 공의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서방 교회의 입장을 변호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안셀무스는 중세 가톨릭 인물이지만, 그의 만족설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속죄론의 바탕이 되었다. 장 칼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형벌 대속설로 발전시켰고, 이 이해는 개혁주의 전통을 비롯한 한국 개신교 설교와 신학 교육에 널리 퍼져 있다. 한국 신학교의 교리사·조직신학 과목에서는 속죄론의 역사를 다룰 때 대개 안셀무스를 주요 인물로 소개하며, 존재론적 논증은 기독교 변증과 종교철학에서 자주 다루어진다.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가 안셀무스의 신학 방법을 다룬 책을 쓴 것도 국내 신학계에 알려져 있다.
평가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리한 인물로 평가된다. 비판도 함께 있다.
- 존재론적 논증은 당대 수도사 가우닐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섬"의 예를 들어 반박했고,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와 칸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만족설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의 아벨라르가 십자가가 보여 주는 사랑의 감화를 강조하는 견해를 내놓았다. 현대에는 하나님의 영예와 배상이라는 개념이 중세 봉건 사회의 관념을 반영한다는 비판, 그리스도가 악의 세력을 이긴 승리를 강조하는 견해에서 나온 비판이 있다. 정교회 신학자들도 서방 속죄론이 법적 개념에 치우쳤다고 지적해 왔다.
- 반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만족설이 하나님의 공의와 죄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냈다고 보아 높이 평가하며, 형벌 대속설이 그 한계를 보완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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