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벨하우젠
인물
율리우스 벨하우젠(1844~1918)은 독일의 구약학자이자 동양학자이다. 모세오경이 네 문서(J·E·D·P)로 이루어졌다는 '문서설'을 체계화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하멜른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하인리히 에발트에게 구약과 셈어를 배웠다. 1872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 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882년 신학부를 떠났다. 자신의 연구가 목회자를 길러 내는 신학부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할레와 마르부르크에서 셈어를 가르쳤고, 1892년부터 괴팅겐 대학교 교수로 일하다가 1918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대표작은 1878년에 낸 『이스라엘 역사』이다. 1883년 『이스라엘 역사 서설』로 제목을 바꾸어 다시 냈다. 그는 모세오경이 모세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고 보았다. 서로 다른 시대에 쓰인 네 문서를 나중에 엮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율법과 제사 규정을 담은 P 문서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가장 늦게 쓰였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앞선 학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프의 연구를 이어받은 것이어서 흔히 '그라프-벨하우젠 가설'이라고도 부른다. 성경을 역사적 문헌으로 보고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따지는 이러한 연구 방법을 역사비평이라고 한다.
후반기에는 연구의 폭을 넓혔다. 초기 이슬람과 아랍 역사를 연구했고, 공관복음 연구서도 남겼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 장로교에서는 문서설과 역사비평을 받아들일지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김영주 목사가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한 문제가 다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해방 뒤에는 김재준이 역사비평을 가르친 일을 두고 박형룡 등 보수 진영과 충돌했다. 이 갈등은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갈라져 나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한국 장로교 분열 참고).
오늘날에도 교단과 신학교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성경 무오설을 강조하는 보수적 교단은 문서설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모세의 오경 저작을 지지한다. 진보적 신학교는 문서설을 구약 연구의 학문적 방법 가운데 하나로 다룬다.
평가
벨하우젠의 가설은 20세기 전반 구약성경 학계에서 표준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문서들의 연대와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연구가 늘었다. 특히 유럽 학계에서는 고전적 형태의 문서설이 크게 수정되었다.
그의 학설에는 몇 가지 비판도 따른다.
- 이스라엘 종교가 단순한 데서 복잡한 데로 발전했다는 진화론적 역사관을 미리 깔고 있다.
- 포로기 이후 유대교를 쇠퇴한 율법 종교로 그려 유대교에 대한 편견이 담겼다.
- 복음주의 학자들은 그의 이론이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약화시킨다고 본다.
한편 그를 지지하는 쪽은, 그가 성경 본문의 차이와 중복을 정밀하게 분석해 근대 성서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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