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역사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서유럽 가톨릭 세계가 교황의 호소에 따라 예루살렘 등 성지를 이슬람 세력에게서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이다.
배경
11세기 후반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튀르크가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 지역)로 세력을 넓히자,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방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동방의 그리스도인을 돕고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참가자들은 옷에 십자가 표지를 달았고,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교황은 원정 참가자에게 죄에 따르는 벌을 면해 주는 대사(大赦)를 약속했다. 이 무렵 동방과 서방 교회는 1054년 서로를 파문하며 이미 갈라진 상태였다(동서 교회 분열).
전개
원정 횟수는 학자마다 세는 방식이 달라, 흔히 큰 원정을 8~9차로 나눈다.
- 제1차(1096~1099):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 등 십자군 국가를 세웠다. 점령 과정에서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이 대거 살해되었다. 원정 초기인 1096년에는 라인강 유역의 슈파이어·보름스·마인츠 등에서 무리가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했다.
- 제2차(1147~1149): 1144년 에데사가 함락되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원정을 설교했으나 실패했다.
- 제3차(1189~1192):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차지하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나섰다. 예루살렘을 되찾지는 못하고 순례자의 출입을 허용받는 협정을 맺었다.
- 제4차(1202~1204): 원정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 이후 이집트를 겨냥한 원정과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원정 등이 이어졌으나, 1291년 마지막 거점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동방의 십자군 국가는 사라졌다.
십자군이라는 형식은 성지 밖으로도 넓어져, 교황청이 이단으로 규정한 남프랑스 카타리파를 상대로 한 알비 십자군(1209~1229) 같은 원정에도 쓰였다.
결과와 영향
성지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지중해 무역과 동서 문화 교류는 늘었다. 반면 십자군 열기와 맞물려 유럽 안의 유대인 박해가 거세졌고, 비잔티움 제국은 제4차 십자군으로 크게 약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동서 교회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대사 제도의 확대는 훗날 종교개혁 시기 면벌부 논쟁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평가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는 신앙적 헌신과 기사도의 이야기로 그려지는 일이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의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일부 역사가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맞선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이슬람권과 정교회권에는 침략과 약탈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1년 그리스를 방문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등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신교는 십자군을 교황권 아래에서 일어난 중세 교회의 일로 보면서도, 그 폭력적 방식이 복음과 맞지 않는다는 반성을 대체로 함께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십자군'이 대규모 전도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집회가 'crusade'로 불렸다. 한국대학생선교회와 연결된 국제 단체 Campus Crusade for Christ는 이 낱말이 주는 부정적 인상 등을 이유로 2011년 미국에서 이름을 'Cru'로 바꾸었다. 또 상대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공격적 선교를 비판할 때 '십자군식 선교'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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