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마펫
인물 · 같은 말: 마포삼열, 사무엘 마펫
새뮤얼 오스틴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다. 한국 이름은 마포삼열(馬布三悅)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지냈다.
생애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태어나 매코믹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26번째 생일인 1890년 1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 이름 '마포삼열(馬布三悅)'은 성 Moffett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마삼열'로 적은 기록도 있다.
1893년부터 평양을 근거지로 삼아 주로 평안도 일대에서 일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다가 1936년 한국을 떠났다.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6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요청으로 부부의 유해가 미국에서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사역과 업적
- 교회 개척: 1893년 조사(助事, 선교사를 돕는 한국인 전도인) 한석진과 함께 평양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이렇게 세운 널다리골교회가 장대현교회의 전신이다.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 신학 교육: 1901년 장로회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자기 집 사랑방에서 두 학생을 가르쳤다. 이것이 평양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시작이다. 그는 초대 교장으로 1924년까지 일했다. 1907년에는 길선주·한석진·이기풍 등 첫 졸업생 7명이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935년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 일반 교육: 1894년 널다리골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이 숭실학교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1918~1928년에는 숭실학교 교장을 지냈다.
- 교회 정치: 1907년 장로교 헌법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장이 되었다.
- 대외 활동: 105인 사건 때 조선 총독에게 항의하고 미국 장로교 본부에 사건을 알렸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에서는 한국의 선교 상황을 소개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초기 선교가 주로 서울에 몰려 있던 것과 달리 그는 평양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 데 큰 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양신학교는 한국 장로교 분열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고신대학교 등이 저마다 그 전통을 잇는다고 보는 공통의 뿌리가 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장로교 교단이 그를 함께 기억한다. 아들 새뮤얼 휴 마펫(마삼락)도 선교사이자 아시아 기독교사 학자로 활동했다.
평가
흔히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로 불린다. 근래에는 신사참배 반대와 105인 사건 대응 같은 일제강점기 행적도 함께 조명되고 있다. 2017년에는 옥성득이 책임편역한 『마포삼열 자료집』이 나와 1차 사료를 연구할 바탕이 마련되었다. 다만 그에게 얽힌 이야기 가운데에는 확인되지 않은 것도 있다. 이기풍이 길에서 전도하던 그에게 돌을 던졌다는 일화처럼 널리 퍼졌지만 전해지는 이야기 수준에 머무는 것들이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10곳
- 새뮤얼 오스틴 모펫 - 위키백과
- 마포삼열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아카이브
- 서정운 전 총장 등 장신대 동문, 미국 마포삼열 선교사 묘지 방문 - 기독일보
-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 목사, 평양신학교 교장 ③ - 기독타임즈
- 평양장로회신학교 - 한국기독교선교센터 지식사전
-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주역, 마포삼열 선교사 - 본헤럴드
- 조선인보다 조선의 독립을 갈망했던 마포삼열 선교사 - 뉴스앤조이 미주(NEWS M)
-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부흥시켰던 선교사 - 아이굿뉴스
- Rev 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 Find a Grave
- Samuel Austin Moffett - Wiki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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