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부처
인물 · 같은 말: 부처, 마르틴 부써, 마틴 부처
마르틴 부처(1491~1551)는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을 이끈 개혁자이다. 갈라선 개혁 진영을 화해시키려 평생 애썼고, 칼뱅주의와 영국 성공회 예배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생애
1491년 알자스 지방의 슐레트슈타트(지금의 프랑스 셀레스타)에서 통 만드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고, 1516년 마인츠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뒤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하던 1518년 마르틴 루터를 만나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수도 서원에서 풀려난 뒤 1522년 수녀 출신인 엘리자베트 질버라이젠과 결혼했고, 이후 파문되었다. 1523년 피난민 신세로 스트라스부르에 와서 약 25년 동안 이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 지역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때 정치 상황이 바뀌어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고, 잉글랜드로 건너가 1549년 12월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흠정 신학 교수(국왕이 임명하는 교수직)로 일했다. 1551년 2월 28일 케임브리지에서 세상을 떠나 대학 교회에 성대하게 묻혔다. 그러나 1557년 메리 1세 여왕의 위원들이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태우고 무덤을 헐었으며, 뒤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사역과 업적
- 화해의 노력: 스트라스부르는 울리히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스위스·남부 독일과 루터의 영향을 받은 중부·북부 독일 사이에 있었다. 부처는 성찬에 관한 루터와 츠빙글리의 대립을 중재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성찬 논쟁 참고),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합의를 끌어내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박해받던 재세례파를 스트라스부르에 받아들이기도 했다.
- 칼뱅과의 관계: 1538년 제네바에서 쫓겨난 장 칼뱅을 스트라스부르로 맞아들였다. 칼뱅의 목회와 사상에 영향을 준 스승 같은 인물로 평가된다.
- 목회와 권징: 회심, 경건, 권징(교회의 치리)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새롭게 하려 했으며, 목회론 저서 『참된 영혼 돌봄에 관하여』를 남겼다.
- 잉글랜드 종교개혁: 1549년판 『공동기도서』를 검토한 의견서 『검토』(Censura)를 썼고, 여기 담긴 제안 가운데 일부가 1552년판에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6세에게 잉글랜드 개혁의 청사진을 담은 『그리스도 왕국에 관하여』를 바쳤고, 케임브리지에서는 에베소서를 강의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부처가 한국 교회에 직접 영향을 준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칼뱅을 거쳐 칼빈주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에 비추어 보면,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그와 신학적 뿌리를 일부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그가 손본 『공동기도서』 전통은 대한성공회가 속한 성공회 예배 전통과도 이어진다.
평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부처를 갈라선 개혁 진영 사이의 화해에 쉼 없이 힘쓴 중재자이자 예배학자로 소개한다. 반면 그의 중재 시도는 대부분 결실을 보지 못했다. 잉글랜드에서도 성찬과 성직자 복장 문제 같은 논쟁 속에서 뜻한 바를 다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루터·칼뱅에 비해 덜 기억되어 왔다는 지적도 있지만, 칼뱅과 영국 종교개혁에 이어진 영향 때문에 16세기의 중요한 개혁자로 꼽힌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6곳
- Martin Bucer - Britannica
- Remembering Martin Bucer - Ecclesiastical History Society
- Martin Bucer and the Reformation in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 Martin Bucer (1491-1551) - Musée protestant
- Who Was Martin Bucer? - Ligonier
- Martin Bucer - Banner of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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