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역사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303년부터 313년 무렵까지 로마 제국이 기독교인을 상대로 벌인 마지막 대규모 박해로, '대박해'라고도 부른다.
배경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3세기의 정치·경제 혼란을 수습하려고 황제 넷이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四頭政治)를 세웠다. 그는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제국 통합의 바탕으로 여겼다. 이 무렵 기독교는 동방 도시를 중심으로 크게 늘어 있었고, 동방 황제가 머물던 니코메디아의 황궁 가까이에도 예배당이 있었다. 초대교회 저술가 락탄티우스는 부황제 갈레리우스가 박해를 부추겼다고 기록했다. 본격적인 박해 이전에도 군대와 궁정에서 기독교인을 내보내는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개
- 303년 2월: 니코메디아의 교회 건물이 헐렸고, 곧이어 첫 칙령이 내려졌다. 칙령은 예배당 파괴, 성경 몰수와 소각, 집회 금지를 명하고 기독교인의 신분과 법적 권리를 빼앗았다.
- 303년: 두 번째 칙령으로 성직자를 체포했고, 세 번째 칙령으로 이교 제사를 드리면 풀어 주게 했다.
- 304년: 네 번째 칙령으로 모든 주민에게 제사를 요구했다. 같은 해 북아프리카 아비티나에서는 주일 집회를 하다 붙잡힌 신자들이 "주일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 박해의 강도는 지역마다 달랐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린 콘스탄티우스는 건물을 허는 데 그쳤다고 전해지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는 더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물러난 뒤에도 동방에서는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박해를 이어 갔다.
- 311년: 갈레리우스가 관용 칙령을 내려 박해를 멈추었다.
-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흔히 '밀라노 칙령'이라 부른다.
결과와 영향
박해는 10년 남짓 만에 기독교 공인으로 뒤집혔고, 뒤이어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공의회(325)를 소집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크게 바뀌었다.
박해 중에 성경을 당국에 넘겨준 사람은 '트라디토르'(넘겨준 자)라 불렸다. 이들의 성직과 그들이 집례한 성례를 인정할지를 놓고 북아프리카 교회가 갈라졌다. 311년 무렵 카르타고 주교 카이킬리아누스에게 안수한 사람이 트라디토르였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도나투스파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집트에서도 배교자 복권 문제로 멜리티우스 분열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주요 기록으로는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와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이 있다.
평가
고대 기록에는 과장이 섞였을 수 있어 순교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대 연구자들은 대체로 수천 명 규모로 추정하지만 수치는 엇갈린다. 후대에 전해진 순교 이야기 가운데에도 전설이 섞인 것이 많다.
한국 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 2장 8-11절의 서머나 교회가 받을 "십 일 동안 환난"을 두고, 일부 세대주의 해석이 교회 시대 구분에 따라 이 박해(303~313)와 연결하기도 한다. 다른 해석자들은 이 구절을 당시 서머나 교회가 겪을 짧은 환난이나 상징적인 기간으로 본다.
박해 뒤 타협한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둘러싼 논쟁은, 해방 뒤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와 복귀 문제(한국 장로교 분열)와 견주어 이야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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