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인물
김익두(金益斗, 1874~1950)는 일제강점기 장로교 목사이자 부흥사이다. 신유(병 고침)를 앞세운 부흥회로 이름을 떨쳤고, 한국전쟁 중 북한 신천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생애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장터에서 행패를 부릴 만큼 방탕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W. L. 스왈렌(Swallen)의 설교를 듣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이듬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1년 스왈렌의 권유로 재령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이어 신천에 파견되어 교회를 개척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뒤 신천교회 목사가 되었는데, 졸업 연도는 자료에 따라 1910년 또는 1911년으로 다르게 적혀 있다.
광복 뒤에도 북한에 남아 신천에서 목회했다. 1950년 10월 14일 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돌던 때, 신천 서부교회 새벽기도회를 마친 뒤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함께 있던 교인 몇 명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역과 업적
1919년 무렵부터 사경회(성경을 집중해서 배우는 집회)와 부흥회에서 병자가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집회에는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크게 몰렸다. 신유를 강조한 그의 부흥운동에 대해 교회 안팎에서 비판이 일자, 재령의 임택권 목사 등이 '이적명증회'를 꾸려 이적(기적) 사례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1921년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국내뿐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다니며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하고, 교회당 150여 곳을 세우고, 2만 8천여 회 설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단 행정에도 참여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장을 지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교회사에서는 흔히 길선주의 부흥운동에 이어 1920년대 한국 교회 부흥운동을 이끈 인물로 꼽는다. 주기철은 1921년 경남 웅천에서 열린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한 뒤 평양신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봉 같은 후대 부흥사들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신유와 이적을 앞세운 그의 집회 방식은 한국 교회 부흥회 전통의 한 갈래가 되었다.
평가
그에 대한 평가는 시기와 관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 이적 논란: 당시 반(反)기독교 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그를 비롯한 부흥사들을 '고등무당'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오늘날 이적과 신유를 어떻게 볼지는 은사 중지론과 지속론 논쟁과도 이어진다.
- 일제강점기 행적: 그가 신사참배를 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는 기록도 있어 서로 맞선다.
- 조선기독교도연맹 총회장 문제: 1946년 북한에서 만들어진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정권에 협력한 기독교 단체였다. 이 단체는 1949년 무렵 그를 총회장으로 내세웠다. 이 때문에 남한 교회 일부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친공(親共) 인사로 보았다. 교회사가 이찬영 목사 등은 그가 정식 선출이나 취임 없이 이름만 이용당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그가 총회장으로 있던 때에 연맹 가입을 거부한 목회자와 교인들이 고난을 겪었다는 점을 짚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 순교자 인정: 북한은 그를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기록했다. 그가 속했던 황해노회는 교회사학자들에게 연구를 맡기고 세미나를 열어 재평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 순교자기념사업부는 2012년 그를 순교자로 등재하기로 결의했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9곳
- 김익두 - 위키백과
- 김익두 목사 순교자로 등재된다 - 주간기독신문
- 황해노회 "김익두 목사는 순교자"…18일 재조명 세미나 - 주간기독신문
- 김익두 목사에 대한 오해와 해명 - 크리스천투데이
- 김익두 목사는 순교자인가? 미제 간첩인가? - 통일뉴스
- 김익두 인명사전 - 한국컴퓨터선교회(KCM)
- 김익두 인물정보 - 교보문고
- 김익두 - 나무위키
- 조선그리스도교련맹 - 나무위키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토론 0
이 문서에 대한 의견, 다른 관점, 고칠 점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