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역사 · 같은 말: 슬라브 선교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9세기 비잔티움 제국 데살로니가 출신의 형제 선교사이다. 대모라비아에서 슬라브어로 예배를 드리게 하고 글라골 문자를 만들어 '슬라브인의 사도'로 불린다.
배경
형 메토디오스(815년 무렵~885)와 동생 키릴로스(826년 또는 827년~869)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데살로니가에서 태어났다. 키릴로스의 본래 이름은 콘스탄티노스이다. 키릴로스라는 이름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수도사가 되면서 받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메토디오스는 슬라브인이 많이 사는 변경 지방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수도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부해 학자로 이름을 얻었다. 두 사람은 860년 무렵 흑해 북동쪽에 사는 하자르인에게 가는 선교에도 함께 참여했다.
9세기 중부 유럽의 슬라브 국가 대모라비아에는 이미 프랑크 왕국(지금의 독일 지역)의 라틴 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대모라비아의 군주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 세력에게서 벗어나려 했고, 그래서 비잔티움 쪽에 교회의 도움을 청했다. 학자들은 이 요청에 종교적 동기 못지않게 정치적 동기가 컸다고 본다.
전개
- 862년: 라스티슬라프가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3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에게 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황제와 총대주교는 두 형제를 보냈다.
- 863년: 형제가 대모라비아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슬라브어를 적기 위해 글라골 문자를 고안했다고 전해진다. 형제는 이 문자로 복음서와 주요 예배 문서를 슬라브어(오늘날 '고대 교회 슬라브어'라 부르는 말)로 옮겼다.
- 867년 무렵: 라틴어 예배만 인정하는 프랑크 쪽 성직자들과 갈등이 생기자 형제는 로마로 갔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슬라브어 예배를 승인했다.
- 869년: 키릴로스가 2월 14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메토디오스는 시르미움(판노니아)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슬라브인에게 보내는 교황 사절이 되었다.
- 870~873년: 메토디오스가 맡은 지역에서는 바이에른 지방(지금의 독일 남부)의 주교들이 이미 선교를 해 오고 있었다. 이들이 메토디오스의 임명에 반발해 그를 체포하고 가두었다. 873년 교황 요한 8세가 개입해 풀려났다.
- 880년: 메토디오스는 이단 혐의와 슬라브어 사용 문제로 다시 로마에 불려 갔다. 혐의를 벗은 뒤 요한 8세는 교서 「인두스트리애 투애」(Industriae tuae)로 슬라브어 예배를 다시 인정했다.
- 885년: 메토디오스가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프랑크계 주교 비힝은 슬라브어 예배를 억눌렀고,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은 쫓겨났다.
결과와 영향
대모라비아에서 슬라브어 예배는 오래가지 못했고, 나라도 902~907년 사이 마자르인(헝가리인)의 침입으로 무너졌다. 쫓겨난 제자들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이어 갔다. 10세기 무렵 그곳에서 그리스 문자를 바탕으로 새 문자가 만들어졌는데, 스승의 이름을 따 키릴 문자라 부른다. 오흐리드의 클레멘트와 나움 같은 제자들이 이 일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와 키릴 문자는 동유럽 정교회 세계의 예배 언어와 문자로 퍼졌다. 오늘날 러시아어·불가리아어·세르비아어 등이 키릴 문자로 쓰인다.
평가
두 형제는 1054년의 동서 교회 분열 이전 사람들이다. 그래서 동방과 서방 교회가 함께 성인으로 기린다.
- 정교회는 두 사람을 '사도와 동등한 자'로 부른다. 5월 11일에 기념하며, 율리우스력을 쓰는 교회는 양력 5월 24일에 기념한다.
- 천주교는 2월 14일에 기념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두 사람을 베네딕토와 함께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1985년에는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을 발표해 동서 교회 화해의 본보기로 제시했다.
- 성공회와 일부 루터교회도 이들을 기념한다.
- 슬라브 여러 민족은 두 사람을 자기 문자와 문화의 시작으로 기억한다. 19세기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이 만든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처럼, 근대 민족운동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의 선교가 비잔티움, 프랑크 왕국, 로마 교황청 사이의 정치적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다. 모라비아가 이들 덕분에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이해는 사실과 다르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다른 민족의 말과 글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게 하려 한 이들의 시도는 선교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주제는 훗날 종교개혁 시기의 자국어 성경 번역, 한국 선교 초기의 한글 성경 번역과도 맞닿아 있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14곳
-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 위키백과
- 키릴로스 (9세기) - 위키백과
- 메토디오스 - 위키백과
- Saint Methodius - Britannica
- Cyril and Methodius - Wikipedia
- Saint Cyril and Saint Methodius - EBSCO Research Starters
- Great (Old) Moravia - University of Cambridge, Christianization project
- Archbishopric of Moravia - Wikipedia
- Great Moravia - Wikipedia
- 14 February: Cyril and Methodius - oremus.org
- St Cyril, monk, and St Methodius, bishop - Women for Faith & Family
- Slavorum Apostoli (2 June 1985) - Vatican
- Saints Cyril and Methodius - New World Encyclopedia
-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과 근대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 - K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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