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티케스
인물
유티케스(Eutyches, 380년경~454년 이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원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합쳐져 하나의 본성이 되었다고 가르쳐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생애
유티케스는 4세기 말에 태어나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의 이스탄불)의 한 수도원에서 오래 원장으로 지냈다. 수백 명의 수도사를 거느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궁정에서 권력을 쥐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의 대부(代父)였다고 전해지며, 이 인연으로 궁정에 영향력이 있었다. 한국어로는 '에우티케스', '유튀케스'로도 적는다.
448년 도릴레움의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그의 가르침을 고발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가 주재한 회의는 그를 면직하고 파문하였다. 유티케스는 로마 주교 레오 1세 등에게 호소하였고, 레오는 449년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서신(흔히 '레오의 교서'라 부른다)에서 그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같은 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가 주도한 제2차 에베소 회의는 유티케스를 복권하고 플라비아누스를 면직하였다. 이 회의는 반대편에서 '강도 회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451년에 소집한 칼케돈 공의회가 유티케스를 다시 정죄하였고, 그는 유배되었다. 그 뒤의 행적과 사망 연도는 분명하지 않다.
사상과 쟁점
유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그리스도를 두 인격처럼 나눈다고 보아 이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448년 심문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연합 이전에는 두 본성에서 나왔으나 연합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이라고 고백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와 같은 본질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기를 오래 망설였다. 반대자들은 이를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사라진다는 주장으로 이해하였고,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을 흐리게 하여 가현설에 가깝다고 비판하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이에 맞서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지니며, 두 본성은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다"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는 이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기독론의 기준이 되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유티케스가 한국 교회에 직접 끼친 영향은 없다. 다만 그를 정죄한 칼케돈 정의는 한국 개신교 대부분이 받아들이는 기독론의 바탕이다. 장로교가 표준 문서로 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은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변화나 합성이나 혼합 없이" 한 인격으로 연합되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칼케돈의 표현을 따른 것이다. 한국의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는 교회사와 성육신 교리를 가르칠 때 유티케스를 네스토리우스와 함께 기독론의 두 극단으로 소개한다.
평가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는 모두 유티케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판단한 칼케돈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칼케돈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콥트·시리아·아르메니아 교회 등은 흔히 '단성론' 교회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 교회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따라 신성과 인성이 섞이지 않은 채 하나로 결합된 본성을 말하며, 유티케스 역시 이단으로 거부한다. 레오 1세는 유티케스를 경솔하고 미숙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현대 학자들 가운데에는 그가 정교한 신학자라기보다 반(反)네스토리우스 진영의 표현을 지나치게 밀고 나간 수도사였으며, 교회 정치의 대립 속에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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