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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徐南同, 1918~1984)은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목사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 속에서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꼽힌다.

생애

전라남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해방 뒤 목회와 신학 교육에 종사했고, 한국기독교장로회 계열인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이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로 오래 재직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에서 기독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연세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1976년에는 함석헌·문익환 등과 함께 이른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1984년 세상을 떠났다.

사역과 업적

서남동은 서구 신학의 새 흐름을 국내에 빠르게 소개하여 '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소개한 사상에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상, 세속화 신학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감옥과 노동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민중'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1975년 『기독교사상』에 실린 그의 글은 같은 해 안병무의 글과 함께 민중신학의 출발점으로 흔히 꼽힌다. 그는 다음과 같은 개념을 제시했다.

  • 두 이야기의 합류: 성경과 교회사의 민중 전통이 한국 민중의 역사 경험과 합쳐진다는 생각이다. 한국 민중의 역사 경험에는 동학, 탈춤, 판소리 같은 민중 문화가 포함된다.
  • 한(恨): 억눌린 민중의 응어리진 고통을 신학의 주제로 다루었다. 시인 김지하의 작품을 신학적으로 읽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민중의 사회전기: 교리보다 민중이 겪은 구체적 삶의 이야기를 신학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주요 저작으로 1983년에 나온 『민중신학의 탐구』가 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한국 진보 개신교의 사회 참여와 인권·노동 운동에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그의 신학은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변의 신학자·목회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해외 신학계에 '한국에서 나온 상황신학'으로 소개되어 아시아 신학 논의에 자리 잡았다.

평가

지지하는 쪽은 그가 서구 신학을 옮겨 오는 데 그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한국 민중의 역사 경험에서 신학을 길어 올린 독창적 신학자라는 것이다. 또한 군사정권 아래에서 신학과 실천을 함께 보여 주었다고 본다.

복음주의·개혁주의 계열의 보수 교단과 신학자들은 몇 가지를 비판한다.

  • 민중을 구원의 주체처럼 다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 사역과 기독론을 약화시켰다.
  • 성경의 권위를 민중의 경험 아래 두었다.
  • 교회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겼다.

민중신학 진영 안에서도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 사상을 충분히 다듬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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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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