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인물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일제강점기에 『성서조선』 동인으로 활동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광복 뒤에는 월간 『씨알의 소리』를 펴낸 언론인·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다.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생애
1901년 평안북도 용천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여한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1921년 정주 오산학교에 편입해 류영모 등에게 배웠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27년에는 김교신 등과 함께 동인지(뜻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펴내는 잡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했다.
귀국한 뒤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 교사로 일했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약 1년 동안 갇혔다. 1942년에는 김교신의 글 「조와」가 문제가 된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다시 1년 동안 수감되었다. 광복 뒤에는 신의주 학생들의 반공 시위를 배후에서 이끌었다는 혐의로 북한 당국에 투옥되었고, 1947년 남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부터 잡지 『사상계』에 정치·사회 비평을 썼다. 1958년 자유당 정권을 비판한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때문에 구금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군사정권 시기에는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유신 반대 운동에 참여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고,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사역과 업적
- 역사 서술: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다. 이 글은 나중에 특정 교파의 색채를 덜어 내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 『씨알의 소리』: 1970년 4월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씨알'은 평범한 백성, 곧 민중을 가리키는 그의 용어로, 역사의 주체가 권력자가 아니라 씨알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잡지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했다.
- 비폭력 평화 사상: 성서와 동서양 고전을 아울러 비폭력·민주·평화를 내세운 '씨알 사상'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함석헌은 목사가 아니었고 특정 교단에 속해 목회하지도 않았다. 제도 교회 바깥에서 성경 강의와 글쓰기로 활동했다. 1960년대 무렵부터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드문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그는 한국 교회가 '마술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에 앞장서야 하고, 교인은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신앙을 바탕으로 독재에 맞선 그의 삶은 교회와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된다.
평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상가로 높이 평가되며,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 추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논쟁도 있다. 그는 퀘이커의 침묵 예배, 불교의 참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본질적으로 비슷한 종교 행위로 보았다. 이처럼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태도를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서 어떻게 볼지를 두고 해석이 갈린다. 또 그의 사상에 사회진화론(사회도 생물처럼 경쟁 속에서 발전한다는 이론)의 영향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김상봉은 2010년 이 잡지에 반론을 실었다.
함께 보기 6
참고한 자료 7곳
- 함석헌 - 위키백과
- 함석헌 - 디지털도봉문화대전
- 무려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됐던 함석헌
-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창간사 - 오마이뉴스
- 박정희도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 5·18항쟁의 '씨알' 만들다 - 오마이뉴스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 KCI
- 함석헌 선생의 생애와 업적(신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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