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김대건(1821~1846)은 조선 후기 천주교 사제이다. 184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천주교 사제가 되었고, 1846년 병오박해 때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생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나 충청도 솔뫼에서 자랐다. 1836년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뽑혔다. 같은 해 12월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들이 떠날 때 평신도 정하상 등이 도왔다. 1842년에는 귀국할 길을 찾으려고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에 통역으로 탔고, 필리핀과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근교 김가항(진쟈샹) 성당에서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사제의 직분)을 받았다. 이로써 한국인 첫 천주교 사제가 되었다. 그해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너 10월 12일 지금의 나바위성지 일대에 상륙하였다.

사역과 업적

귀국한 뒤에는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신부가 머물지 않는 작은 신앙 공동체) 등지를 오가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1846년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아, 다른 선교사들이 바닷길로 들어올 통로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 6월 5일 황해도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탐사한 결과를 편지로 페레올 주교에게 보고하였고, 신자들에게는 작별 편지를 남겼다. 그는 배교를 거부하였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목을 베어 군문에 내거는 형벌)을 받았다. 그때 나이 25세였다. 그가 체포된 일로 시작된 이 박해를 병오박해라 한다. 그는 「조선전도」라는 지도를 만들어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 데 이바지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그의 시신은 안성 미리내에 묻혔다가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졌다. 1925년 복자(성인 바로 전 단계로 공경받는 사람)로 선포되었다. 1984년 5월 6일에는 서울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정하상 등 102명과 함께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 103위 시성은 한국 천주교 역사의 큰 이정표로 여겨진다. 유네스코는 2019년 제40차 총회에서 탄생 200주년인 2021년의 세계기념인물로 그를 선정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2020년 11월부터 1년 동안을 탄생 200주년 희년(특별히 기념하는 해)으로 지냈다.

평가

천주교는 그를 신앙과 사제직의 모범으로 공경한다. 조선 조정은 서양인과 연락한 그를 나라에 위험한 죄인으로 다루었다. 반면 그는 처형 직전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오직 신앙 때문이었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한다. 개신교는 시성 제도와 성인 공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개신교에서 그는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기 전 조선 천주교 박해 시기를 대표하는 역사 인물로 다루어진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10곳
  1. 김대건 신부와 그의 기록 (국가기록원)
  2. 김대건 - 위키백과
  3. 김대건 - 우리역사넷
  4. 나바위성지와 김대건신부
  5. 병오박해 - 위키백과
  6. 성 김대건 신부의 생애
  7.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의미와 행사 (가톨릭신문)
  8. 김대건 신부,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 (글로벌이코노믹)
  9.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우표 (K-stamp)
  10.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 교회 첫 성인 103위 탄생 (가톨릭굿뉴스)

본문은 이 자료들을 참고해 새로 쓴 글이며, 자료의 글을 옮겨 싣지 않았습니다.

첫 글: AI 초안 · 마지막 수정 2026-10-13

토론 0

이 문서에 대한 의견, 다른 관점, 고칠 점을 남겨 주세요.

로그인하고 토론에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