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상
인물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은 조선 후기 천주교의 평신도 지도자이다. 신유박해 뒤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우고 성직자를 데려오는 데 힘썼으며, 기해박해 때 『상재상서』를 남기고 순교했다.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생애
1795년 경기도 양근 지역에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유소사(체칠리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마재라고도 하고 분원이라고도 하여 자료마다 다르다. 정약용의 조카이다. 1801년 신유박해(조정이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잡아 처형한 사건) 때 아버지와 형 정철상이 처형되었다. 재산까지 빼앗긴 뒤 어머니, 누이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친척에게 얹혀 어렵게 살았고, 신앙을 버리지 않아 친척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고 전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붙잡혀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22일 역관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목이 베여 죽었다. 이때 나이는 만 44세였다. 어머니와 누이도 같은 박해 때 목숨을 잃었다.
사역과 업적
- 성직자 영입 운동: 박해로 사제가 한 명도 남지 않은 교회를 다시 세우려면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1816년 처음 베이징에 다녀온 뒤 사신 일행의 하인으로 끼어 베이징을 아홉 차례 오가며 베이징 주교에게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교황에게 보낸 편지: 1825년 유진길 등과 함께 조선 신자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선교 업무를 맡은 교황청 부서)에 전해졌다. 1831년 조선대목구(선교지에 두는 교구)가 세워지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 선교사 입국 돕기: 중국인 유방제 신부, 프랑스 선교사 모방·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몰래 들어오도록 도왔다. 앵베르 주교 밑에서 사제가 되려고 공부했으나 박해 때문에 사제가 되지는 못했다.
- 『상재상서』: 붙잡힐 것을 예상하고 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미리 써 두었다. 2천여 자 분량의 짧은 글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박해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천주교에서는 한국인이 쓴 첫 호교론(신앙을 변호하는 글)으로 꼽는다.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천주교에서는 성직자가 없던 시기에 평신도가 교회를 이끌고 외부와 연락한 대표 사례로 정하상을 꼽는다. 무덤은 1981년 옮겨져 하남과 천진암 성지에 모셔졌다. 천주교는 해마다 9월 20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지킨다. 이름에 정하상이 들어간 것은 그가 평신도를 대표하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개신교는 성인을 공경하거나 시성(교회가 성인으로 공식 선포하는 일)하지 않으므로 그를 성인으로 기리지 않는다. 개신교 쪽에서는 한국 천주교 역사와 조선 천주교 박해의 역사 속 인물로 다룬다.
평가
천주교는 그를 교회를 다시 세우고 조선대목구 설정을 이끈 지도자로, 『상재상서』를 박해에 맞서 신앙을 논리로 변호한 글로 높이 평가한다. 1925년 복자가 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서 103위 순교자와 함께 성인으로 선포했다. 반면 당시 조선 조정은 서양 선교사를 몰래 들여온 일을 나라의 금령을 어긴 중죄로 보았다. 함께 심문받은 유진길은 선교사를 모셔 온 것이 신앙 의례에 꼭 필요해서였을 뿐 나라를 뒤엎으려는 뜻은 없었다고 맞섰다.
함께 보기 8
참고한 자료 8곳
- 정하상 - 위키백과
-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성 정하상 바오로 - 가톨릭신문
- 성 정하상, 조선 땅에 선교사 데려오고 대목구 설정에 공헌 - 가톨릭평화신문
- 성 유진길, 선교사 영입과 조선대목구 설정에 핵심적 역할 - 가톨릭평화신문
- 기해박해 -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 103위 시성 25주년: 정하상, 한국 평신도 사도직의 시작 - 마리아사랑넷
- 성 정하상 바오로 - 마리아사랑넷
- 성 정하상 바오로 성인 소개 - 천주교 부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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