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카르 전투
역사
기원전 853년 시리아 오론테스강 근처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 3세와 다메섹·하맛·이스라엘 등 열두 왕의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배경
기원전 9세기에 앗수르(아시리아)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살만에셀 3세(재위 기원전 859~824년경)는 즉위 초부터 시리아와 지중해 연안으로 해마다 원정을 나섰다. 이에 맞서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아람, 하맛, 그리고 아합이 다스리던 북이스라엘 등 서쪽의 작은 나라들이 연합군을 이루었다.
이 나라들은 평소 서로 다투던 사이였으나, 공동의 위협 앞에서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열왕기상 20:34에는 아합이 아람 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은 일이 나오고, 열왕기상 22:1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삼 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고 적는다. 많은 학자가 이 휴전 기간을 반(反)아시리아 연합과 연결해 해석한다.
전개
전투는 살만에셀 3세 재위 6년인 기원전 853년에 일어났다. 이 연도는 아시리아의 연대 목록(해마다 관리 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 해를 구분한 기록)에 근거하며, 이 목록은 기원전 763년의 일식 기록으로 절대 연대가 고정되어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카르카르는 시리아 서부 오론테스강 가, 하맛 영역에 있던 성읍이다.
전투 내용은 주로 살만에셀 3세가 세운 쿠르크 석비를 통해 알려져 있다. 1861년 오늘날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발견되어 영국박물관에 있는 이 비문은 적군을 "열두 왕"으로 소개하고 나라별 병력을 적는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다메섹 왕 하닷에셀(아시리아 기록의 아다드-이드리): 전차 1,200대, 기병 1,200명, 보병 2만 명
- 하맛 왕 이르훌레니: 전차 700대, 기병 700명, 보병 1만 명
- 이스라엘 왕 아합: 전차 2,000대, 보병 1만 명
- 아라비아 사람 긴디부: 낙타 1,000마리
이 밖에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와, 애굽(이집트)으로 읽는 견해가 많은 '무스리'의 군대도 나온다. 아합의 전차 2,000대는 연합군 가운데 가장 많은 수여서, 필사 오류나 과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결과와 영향
살만에셀 3세는 비문에서 적군 1만 4천 명을 죽이고 크게 이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의 비문에서는 그 수가 2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또 그는 전투 뒤 다메섹이나 하맛을 차지하지 못했고, 기원전 849년, 848년, 845년에도 같은 연합군과 다시 싸웠다. 이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는 이 전투를 아시리아의 서진을 일시적으로 막은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로 본다.
연합은 오래가지 않았다. 열왕기상 22장에 따르면 아합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과 싸우다 전사했다. 기원전 841년 살만에셀 3세가 다메섹을 다시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 왕 예후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쳤고, 이 장면이 검은 오벨리스크에 새겨졌다.
평가
성경은 카르카르 전투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쿠르크 석비는 성경 밖 기록 가운데 이스라엘 왕의 이름이 나오는 이른 사례로 꼽힌다. 또한 열왕기가 짧게 다룬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이 상당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보여 주는 자료로 쓰인다.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석비를 열왕기의 역사적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중시한다. 역사비평적 방법을 쓰는 학자들은 열왕기가 아합을 주로 신앙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국제 정세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성경 기록의 서술 의도를 살피는 자료로 활용한다.
이 전투(기원전 853년)와 예후의 조공(기원전 841년)은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를 정하는 기준점이 된다. 아합의 죽음과 예후의 즉위 사이에는 아하시야(2년)와 요람(12년)이 다스렸다. 즉위한 해를 첫해로 세는 방식으로 두 왕의 재위 기간을 계산하면 실제로는 12년이 되어 두 연도의 간격과 맞아떨어진다. 에드윈 틸레가 이 계산을 바탕으로 정리한 연대표는 여러 성경 사전과 주석에 쓰인다. 다만 아합이 853년에 바로 전사했는지 등 세부 연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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