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오벨리스크
역사
검은 오벨리스크는 고대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의 원정과 조공 받은 일을 새긴 검은 석회암 기념비이다. 북이스라엘 왕 예후가 앗수르 왕 앞에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검은 오벨리스크는 신(新)앗수르 제국의 왕 살만에셀 3세(재위 기원전 859~824년경) 때 만들어진 기념비이다. 오벨리스크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네모난 돌기둥을 말한다. 이 비석은 검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 높이는 약 2미터이며 지금은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있다. 이스라엘 왕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동시대 유물로는 유일하여, 성경 역사와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배경
기원전 9세기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서쪽으로 세력을 넓혔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나라들에 조공을 요구했다. 살만에셀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거의 해마다 원정을 벌였다. 기원전 853년 카르카르 전투에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등이 모인 연합군과 맞섰다. 다른 앗수르 비문에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 북이스라엘에서는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다(열왕기하 9~10장).
전개
비석의 네 면에는 면마다 다섯 단씩, 모두 스무 개의 부조가 있다. 부조는 돌을 도드라지게 깎아 새긴 그림이다. 부조 위아래에는 쐐기문자로 왕의 31년간 원정 기록이 적혀 있다. 비석은 살만에셀 3세의 통치 말년에 앗수르의 도시 칼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후는 창세기 10:11의 갈라이며, 오늘날 이라크의 님루드에 해당한다.
부조에는 다섯 지역의 통치자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그중 두 번째 단에는 "오므리의 아들 예후"가 앗수르 왕 앞에 엎드린 모습이 있고, 은, 금, 금 그릇, 주석, 왕이 손에 드는 지팡이 등의 조공 목록이 함께 적혀 있다. 학계는 이 조공이 살만에셀 3세 재위 18년, 곧 기원전 841년 원정 때 바쳐진 것으로 본다. 이해에 앗수르는 다메섹의 왕 하사엘을 공격했다. "오므리의 아들"은 혈통을 뜻하지 않는다. 오므리 집안의 나라, 곧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앗수르식 표현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예후는 오므리 왕조를 끊은 인물이다.
비석은 1846년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님루드를 발굴하다가 찾아내어 영국으로 옮겼다.
결과와 영향
성경에는 예후가 앗수르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열왕기하 10:32-33은 예후 시대에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빼앗았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예후가 아람의 압박 속에서 앗수르의 보호를 얻으려고 조공을 바쳤을 가능성을 거론한다.
기원전 853년 아합의 카르카르 전투 참전과 기원전 841년 예후의 조공은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를 계산하는 중요한 기준점으로 쓰여 왔다. 앗수르는 그 뒤에도 서쪽으로 세력을 넓혔고, 이 흐름은 기원전 722년경 사마리아 함락과 북이스라엘 멸망으로 이어졌다.
평가
복음주의 학자들은 검은 오벨리스크를 성경 속 인물과 연대가 실제 역사와 맞아떨어짐을 보여 주는 고고학 자료로 자주 소개한다. 한국 교회의 성경 고고학 강의나 성지순례 관련 자료에서도 대표적인 유물로 다룬다.
비판적 학자들도 예후가 실존한 왕이었다는 점은 대체로 받아들인다. 다만 이 비문은 앗수르 왕의 위엄을 드러내려는 선전물이므로 성경 기사의 세부 내용까지 입증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엎드린 인물이 예후 본인인지 그가 보낸 사신인지를 두고도 견해가 갈린다. 비문의 이름을 예후가 아닌 다른 왕으로 읽는 소수 견해도 있으나, 다수 학자는 예후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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